서예 이론 연구 절실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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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대한민국 서예대전 입상작품들이 11월14∼25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다 하여 구경을 갔었다. 10여년의 외국생활을 하다 돌아와 처음으로 찾는 서예공모전이라 그간 한국서예가 얼마나 발전되었는가 하는 호시심으로 기대하는 바가 컸었다. 그런데 전시장을 한바퀴 돌고 큰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견해로는 한국의 서예가 차라리 후퇴하고 있다는 기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전시회장의 안내책자를 보니 이번에는 지난해보다 2백14점이 증가된 총1천8백63점이 응모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갈수록 서예 애호가들이 늘어나는 것은 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서가 그 양적 팽창만을 거듭하였을 뿐 질에 있어서 과거보다 뒤지고 있으니 그간의 한국서단이 이론의 연구 없이 몇몇 문호들의 세력다툼에만 골몰해왔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대한민국미술전을 주관하여 그중 한 부서로서 서예부문의 공모전이 존재했었는데 그때에도 세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작가들의 횡포가 문제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국전의 민영화가 요구되었었고 오늘의 대한민국 서예대전도 그러한 과거의 병폐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키니 그것은 바로 전시된 모든 작품들의 천편일률성에서 우선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해서의 경우는 모두가 육조시대의 서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모든 출품작이 육조서풍이었다 해도 문제며, 여타의 서체도 응모되었으나 심사위원의 취향 때문에 육조풍만 입상되었다면 더욱 큰 문제다.
행서나 예서의 경우는 그나마 근본적인 서파는 찾을 수도 없고 거의 다 현존 작가의 흉내만 낸 느낌이니 이름만 틀리지 한두 사람의 글씨를 보는 듯하여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전서에는 석고문이나 등완백풍이 선보였으나 내용면에서는 몇몇 현존작가들의 냄새만 물씬 풍겼으며 한글의 경우 궁체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썽 많았던 과거의 국전도 따지고 보면 오늘의 서예대전보다는 더 다양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때엔 고전의 서파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입상이 결정되었고 특선쯤 되어서는 본인의 창작능력이 고려되는 전통도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의 서예대전이 이러한 악습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서예이론의 부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론이 없으니 건전한 비평이 존재할 수 없고, 비평이 없으니 세력 있는 작가들의 독선이 성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전에 입상이라도 한번 하려면 세도 있는 작가들의 문하에서 그들의 글씨를 열심히 그릴 수밖에 없는 묘한 분위기를 가져오게 한 것 아닌가. 하루속히 어느 곳에서 배웠든 이론에 맞고 창작력이 우수하면 그 작품이 인정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기를 바랄 뿐이다.【김용신<동양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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