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에 빼앗긴 「반도체 덤핑」관심/이철호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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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울 한복판과 청주에서는 며칠째 조용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총칼도 없고 고성이나 멱살잡이도 오가지 않지만 치열하기는 이를데 없다. 미국 상무부의 반도체 덤핑조사단이 국내 반도체업체들을 대상으로 실무조사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11일 오후 미국 조사단 3명이 삼성그룹 본관 8층에서,또 다른 4명은 금성일렉트론 청주공장에서 조사를 펼쳤다. 최고 87.4%의 고율 덤핑 예비판정을 받은 탓인지 삼성과 금성 등 조사대상업체들도 20여명씩에 이르는 통상담당 직원이 며칠째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실무조사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내년초 본판정을 앞두고 칼자루를 쥔 쪽은 어차피 미국이고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그 피해는 우리 업체가 앉아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한국업체의 고율 덤핑판정에 대해 『오랜만에 전해진 좋은 소식』이라며 4메가디램의 생산량을 늘리는 등 남의 상처를 딛고 반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엄청나게 늘어난 대미반도체 수출과 미국 4메가디램 시장에서 최고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우리의 노력도 있었지만 사실 시장가격을 일정수준 이하로 내리지 못하게 일본업체들의 손발이 묶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히려 실무진들이 서운해 하는 것은 국내쪽이다.
87년 미일반도체 분쟁으로 일 기업이 몰리고 있을때 일본은 국가 전체가 지극한 관심을 표시한데 비해 우리는 때이르게 불어닥친 대선열풍으로 관심의 뒷전으로 밀렸기 때문이다.
『지나친 관심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 조사단도 다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으면서도 「예비판정에 대해 한국에서 그렇게 비판적인 분위기가 형성될줄 몰랐다」며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그만큼 미국도 한국 분위기를 신경쓰는 것입니다. 엄청난 선심공약이나 클린턴대통령 당선자에게 줄대기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역사상 최대의 통상마찰인 반도체에도 관심을 가져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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