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정략에 추곡가 표류(초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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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부결되면 정부와 불편… 대선에 지장” 시간벌기 민자/농촌표의식 「정부안 저지노력」 알리기 급급 민주·국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인 올 추곡수매문제는 여야가 온존하던 시절과는 양상이 사뭇 다른 정당간 정쟁으로 인해 결국 이번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대통령선거 이후로 미뤄질 공산이 매우 커졌다.
그동안 민자·민주·국민 등 3당은 추곡수매 정부안(5% 인상,8백50만섬 수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관 상위인 농림수산위의 의안상정마저 거부한채 정부측에 수정안을 내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상위활동 종료일인 9일이 닥치자 막바지에 몰린 농림수산위는 이날 오전 3당 합의로 겨우 정부안을 상정했다. 그렇지만 그 처리에 있어서는 민자당과 민주·국민당이 끝내 서로 다른 속셈을 드러내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채 일단 상위활동을 마감했다. 농림수산위는 9일 오전 3당간사협의를 통해 정부안을 상정,정부측 제안설명을 듣는데까지는 성공했다. 강현욱농림수산부장관은 회의에서 『추곡매입 문제는 전체 재정운영과 연결돼 있는 만큼 농림수산부의 재량권은 없다』고 최종 입장을 확인했다. 이에 「정부안 수정동의안 제출권고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했던 민자당과 민주·국민당 사이에 정부안처리에 관한 시비가 붙어 격렬한 언쟁이 오갔다.
강 장관의 제안설명이 있고나서 정 위원장은 『이제 3당간사가 합의한대로 수정안 제출권고 결의안을 채택하자』면서 민자당의 의지대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민주·국민당측은 『3당이 이미 세차례나 채택한 수정안제출 촉구결의안을 정부측이 묵살한 마당에 상정된 정부안을 부결하지 않고 다시 결의안을 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이후 민자 대 민주·국민당 사이에 삿대질과 고함이 난무하자 정 위원장은 낮 12시20분쯤 회의를 오후 2시에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를 선포했다.
정 위원장은 당고위층의 의사를 타진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민자당 의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아 회의는 속개되지 못했고 민주·국민당의원들은 위원장실에서 농성태세에 들어갔다.
정 위원장은 오후 7시30분쯤 회의장에 나왔으나 『회의를 속개하지 않은 경위를 밝히라』고 항의하는 민주·국민당의원들을 따돌렸다. 그는 이어 밤 8시45분쯤 민주당 간사인 김영진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회의는 안하겠다. 내일 오전 회의를 다시 열자』고 통보,결국 이날 회의는 유회되고 말았다. 이날 공전사태는 외견상 3당 간사들이 시간에 쫓긴 나머지 회의수순을 명쾌히 매듭짓지 않고 개의부터 하자고 한데서 발단됐으나 사실은 대선을 코앞에 둔 민자당과 민주·국민당의 정략이 크게 다른데서 연유한다. 정 위원장이 회의를 진행하지 않고 잠행한 것은 정부안을 부결시켜 추곡수매에 관한한 강경입장의 중립내각과 불편한 관계를 맺는게 대선을 치르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편 민주·국민당이 정부안 부결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농민입장에서는 「반농민적인」 정부안에 대해 실제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는 농촌표밭의 비난을 면하기 위한 정략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전농소속 농민들이 이날 과천 정부제2청사를 점거,시위를 벌인 것에 대해 『붙잡힌 농민들을 찾아가 위로해야 한다』는 등 상당히 자극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여야가 대립하던 시절 정부·여당이 합심,날치기도 불사한채 밀어붙여졌던 추곡수매동의안은 이번에는 3당의 정치선전도구로만 이용되다 대선이후로 처리가 미뤄지는,과거와는 또다른 파행의 길을 걷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됐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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