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칠레 FTA(자유무역협정) 반년째 허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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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눈치보기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6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한.칠레 FTA 비준안이 국회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칠레 시장에서 한국 상품이 설 자리는 계속 좁아지고 있다. 칠레 시장에서 2위를 고수하던 한국 자동차는 이제 4위로 밀려났고, 잘 나가던 휴대전화 수출도 된서리를 맞고 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는 한.칠레 정상이 지난 2월 서명한 뒤 7월 국회에 제출한 한.칠레 FTA 비준 동의안을 6개월째 심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비준안이 내년 1월 7일까지로 예정된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16대 국회 임기 중 처리는 물 건너갈 것으로 보인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이 농민 표를 의식해 비준안 처리를 총선 이후로 미룰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민주당.열린우리당.자민련 등 4당은 공식적으로는 비준안을 연내 처리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막상 비준안을 다루는 통외통위 의원 일부는 연내 처리에 반발하고 있다. 조웅규(한나라당)의원은 "농촌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이 비준안 심의만 해도 농촌에서 분위기가 나빠진다며 심의 자체를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의원이 개인적으로는 FTA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표를 의식해 나서려 하지 않고 있다. 농촌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부 도시지역 출신 의원들마저 개방 반대 분위기에 휩쓸려 선뜻 찬성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농민이나 정치권의 우려가 과장됐다고 본다. 한.칠레 FTA로 직접 영향을 받는 농산물은 사과.배.포도 등 과실류에 그친다. 과실류는 최장 16년까지 시장 개방을 늦출 수 있어 농민 피해를 최소화했다. 한양대 연구팀은 한.칠레 FTA로 앞으로 10년간 농가소득이 5천8백60억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FTA 지원특별법은 내년부터 10년간 농민들에게 1조2천억원을 지원하도록 돼 있다. 가장 타격이 예상되는 과수 농가들은 오히려 FTA 비준에 별다른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일부 농민단체가 한.칠레 FTA를 농산물시장 개방의 출발점이라며 반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와중에 칠레 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칠레자동차협회(ANAC)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수입한 한국산 자동차는 1만1천6백93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7% 줄었다.

칠레가 지난해 11월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에 가입한 뒤 아르헨티나.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자동차가 무관세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일본에 이어 2위를 유지하던 국산 자동차의 점유율은 4위로 하락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칠레에 30만대의 휴대전화 수출을 계획했으나 20만대도 채우기 힘들 전망이다. 한국 업체는 6%의 관세를 물지만 경쟁사인 노키아나 소니에릭슨 등 유럽 업체들은 무관세로 휴대전화를 수출하기 때문이다.

칠레와의 FTA가 비준받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앞으로 추진할 일본.중국.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의 FTA 협상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비준 실패는 또 정부가 서명한 뒤 의회 비준을 받지 못한 세계 최초의 FTA라는 기록을 남길 전망이다.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FTA를 맺지 않겠다는 것은 경제 성장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홍.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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