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의 자리매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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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을 전후해 출생한 세대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교육을 받으면서 흥미와 관심을 가졌던 것중의 하나는 계급에 관한 것이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배웠으면서도 대통령은 언제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 정도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계통이면서도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자리」와 「자리」의 높낮이를 가리는 일은 어려웠다. 50년대의 중·고등학생들은 이 문제로 곧잘 입씨름을 벌이곤 했다.
가령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문교부장관과 서울대총장,재무부장관과 한국은행총재…는 과연 어느쪽이 윗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중에는 지휘체계가 분명하게 서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높낮이를 가릴 수 없는 서로 독립된 「자리」인 경우도 많았다.
재무부장관과 한국은행총재의 경우 많은 학생들이 재무부장관이 훨씬 높고,한은총재는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우겨댔다. 그같은 주장이 설득력 있게 먹혀 들어간 까닭은 한은총재가 재무부장관에 의해 제청,임명되게 되며 그 까닭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례가 줄곧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들 세대가 성장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스갯소리 아닌 우스갯소리로 들어온 것은 「한은총재는 재무부의 국장급」이라는 것이었다.
두말할 나위없이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으로서 화폐의 발행과 통화신용정책의 수립·조직·집행의 기능을 주관하고,은행감독·외국환관리 등을 책임지는 독립된 기관이다. 50년 한은이 창립될때 한은법을 초안한 미국의 브룸필드박사도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중앙은행으로서의 둑립성과 중립성의 보장이었다.
그러나 한은을 휘어잡으려는 정부의 속성과 이를 뿌리치려는 한은의 속성은 기회있을 때마다 맞부딪쳐 갈등을 빚어왔다.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총재자리를 갈아치우기 예사여서 60년대의 경우 1년 미만 총재가 5명에 이를 정도였다. IBRD가 법적 독립성과 총재교체비율을 토대로 작성한 각국 중앙은행의 독립성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조사대상 56개국중 4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정부의 간섭과 요구를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는 외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부럽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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