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 양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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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바위 같은 딱딱함이 초목의 부드러움보다 앞서는 시절이 있었다.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시멘트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물러빠진 사회를 튼튼히 만들고픈 그의 바람 탓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지금에야 회색 콘크리트 빌딩 숲이 어떠니 하며 과거의 발전지상주의에 조소를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그때는 사실 너무 못살았다.
그래서 운치어린 흙담이 「브로꾸」(블록)로 뒤바뀌고 초가가 슬레이트지붕으로 변모하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모두들 발전한다고 환호를 보냈고 사실 결과도 그랬다. 국가재건의 상징처럼 돼버린 시멘트사업이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딘 것은 61년10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시멘트 외자도입사업자 선정공고가 나면서부터. 당시에도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라는 시멘트공장이 있었으나 생산량이 부족, 국내소비량의 절반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때 금성방직과 태평방직·고려화재해상보험·국민학원 등을 소유해 이미 손꼽히는 재력가이자 정치가의 위치에 있던 고 김성곤 회장(별명 SK)은 방직공장의 비수기인 여름철이 시멘트의 성수기라는 매력 때문에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수개월의 석회석광산 조사끝에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룡리에서 막대한 매장량을 발견하곤 62년 이곳의 지명을 딴 「쌍용양회」를 건립했다. 독일에서 기계를 들여와 64년4월 마침내 시멘트를 첫 생산한 쌍용은 국내의 건설경기 등과 맞물려 첫 해외수출을 하는 등 눈부신 성장을 하게됐다.
이후 쌍용은 시멘트사업에 주력, 금성·태평방직을 매각하고 68년 동해에 연산 3백만t의 세계최대 단일시멘트공장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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