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아! 노무현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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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같은 날 2시간 전, TV 뉴스엔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 평가포럼'이라는 열성 지지자들 모임에서 무려 4시간 동안 격정의 특강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방청석 곳곳에 알 만한 저명인사들이 눈에 띈다. 대통령이 뭔가 호소할 때,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언론을 공격할 때, 대선 후보 공약 중 하나인 대운하를 가차없이 공격할 때, "한국 지도자가 독재자의 딸…"이라고 말했다가 또 이를 교묘하게 둘러댈 때마다 환호했다. 대통령 스스로 "내가 코미디언이냐. 왜 자꾸 웃느냐"고 할 만큼 장내는 웃음 속에서 열광하고 대통령의 속 시원한 발언과 제스처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신문 중앙SUNDAY는 강연 내용을 소상히 전재했다. "한나라당 집권할 것 생각하니 끔찍하다"며 야당 공격으로 자화자찬 '4시간 원맨쇼'를 했다고 했다.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 하게 해서…"로 박수 환호를 받으며 "참여정부에서 언론정책이 가장 보람 있었다"며 언론을 공격하고 "나 스스로를 세계적인 대통령이라 생각한다"며 참여정부를 자평했다. 그 현장은 종교집회 같기도, 대선 출정식 같기도 했다고 기자는 적고 있다.

지금 쓰는 이 칼럼은 2000자 정도다. 노 대통령은 이 강연을 위해 64000자의 글을 썼다고 한다. 무려 32배에 이르는 장문이다. 며칠 밤을 지새우고 강연 전날도 밤잠 설치며 글을 썼다고 했다. 왜 대통령은 분초를 다투는 국정을 미루고 이 특강을 위해 이런 헌신,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아무리 '나쁜 대통령'이라 해도 일찍이 현직 대통령이 대놓고 대선 후보들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하게 공격한 적이 없다. 어떤 군사독재정권이라 해도 기자실 축소를 공개적으로 내걸고 언론과의 전면전을 시도한 대통령은 없었다. 이미 노 대통령은 2004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여당 편을 든 발언을 했다 해서 선거관리위원회의 위법 판정을 받았고 이게 빌미가 돼 탄핵 사태까지 간 사례가 있다. 매우 잘 짜인 대본에 따라 기성 정치 관행과 상식을 정면으로 깨부수겠다는 결연한 목적이 없었다면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노무현식 어젠다 세팅은 사회적 욕구가 강한 의제를 택해 끝까지 몰아붙이는 명분집착형 벼랑끝 전술이라고 나는 분석한 적이 있다. 갈등 분열 구도를 첨예하게 부각 대립시켜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특이한 방식이다. 기자실 축소라는 턱없는 언론정책을 밀어붙여 대통령이 언론을 탄압하는 게 아니라 언론이 대통령을 압박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킨다. 대통령은 세계적 수준의 대통령인데 낡은 정치관행에 물든 정치인.대선 후보들이 참여정부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핍박의 상황으로 몰아간다. 부유세를 내는 가진 자, 명문대 출신 기득권 세력, 보수 언론이 앞장서 이 시대를 개혁하고 구원하는 불세출의 정치지도자를 공격하고 궁지로 몰고 있다, 우리끼리 뭉치자, 이게 4시간 원맨쇼의 핵심 아닌가. 아! 노무현 대통령!

권영빈 논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