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로 20억 날렸습니다”/전 백화점 사장의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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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승부조작에 속아 9년만에 가산탕진
『승부조작의 마수에 걸려 20억원의 재산을 날렸습니다.』
경마의 승부조작 혐의로 기수와 조교사 등 8명이 구속되고 조교사 최연홍씨(51)가 목매 자살한 26일 경마에 미쳐 가산을 탕진하고 인간관계마저 모두 끊겨 폐인이 됐다며 전직 백화점사장인 이모씨(45·서울 서초동)가 경마부조리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서울 H대학 상대를 졸업하고 개인사업을 하다 84년부터 지난해까지 지방에서 유명백화점을 경영한 이씨는 『경마 9년 경력의 자신이 우승유력마에 돈을 걸 때마다 결과가 빗나간 것은 기수와 조교사 등이 경마브로커와 짜고 승부를 조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씨가 경마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84년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백화점 부장 김모씨(49)의 권유를 받고부터.
이씨는 『조교사와 기수들을 잘 알고 있어 돈만 있으면 몇배로 벌 수 있다』는 김씨의 말에 솔깃해 3백만원을 들고 서울 송파장외발매소(TV경마소)로 향했다.
10만원씩 계속 돈을 건 이씨는 두번째 베팅에서 10배짜리 마권이 당첨돼 1백만원의 목돈을 만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몽땅 털린채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씨는 그후 매주 경마가 벌어지는 금·토·일요일에는 어김없이 사업을 내팽개친채 2천만∼3천만원 상당의 어음·가계수표·현금 등을 갖고 서울로 자가용을 몰았다. 기수·조교사들과 연결돼 용하다는(?) 꾼들로부터 정보를 듣는 대가로 당첨금액의 10%를 주는 등 나름대로 노력한 끝에 하루에 1억원을 손에 넣기도 했지만 점차 사기의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경마에 중독된 이씨는 빌딩 2개 등을 판 20억원을 모두 탕진했지만 살고 있는 집을 은행에 저당잡혀 빌린 5천만원으로 지금도 주말마다 경마장을 찾고 있다.
이씨가 가장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경마장에 가느라 지난 89년 1월 서울대병원에서 9개월간의 투병끝에 숨진 아버지의 임종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한 것.
이씨는 『지금도 목요일 저녁만 되면 다음날 경주가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져 잠을 설친다』며 『9년 경마끝에 당뇨병과 고혈압만 얻었다』고 신세를 한탄했다.
『경마는 가정파탄의 지름길입니다. 친구를 망하게 하려면 경마장으로 데려가십시오.』
1남2녀의 가장이지만 약국을 운영하는 부인에게 얹혀 근근이 생활하는 이씨는 『다시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김상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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