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의 다음 수순(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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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태우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을 비교하는 이런 말들이 시중에 나돈 적이 있다. 육사시절 전 전대통령이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을때 노 대통령은 방에 차분히 옷을 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작전때도 전 전대통령은 정면돌파전을 즐겼지만 노 대통령은 매복·기습전을 선호했다는 얘기다. 말 재미를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겠지만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면이 없지 않다.
○발전­혼란의 갈림길
확실히 지난 날을 돌이켜 볼때 정치에 있어서도 노 대통령은 「모양」을 중시하고 기습에 능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노 대통령이 해외나들이를 즐기고 그의 주변에 뛰어난 「말꾼」「글꾼」들을 포진시켜온 것도 모양을 중시하는 그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6·29선언이나 3당합당,이번 9·18선언은 기습에 능한 그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실망은 그 모양과 말에 내용과 실천이 뒤따르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노 대통령이 이제까지 행한 연설이나 기념사들을 읽어보면 「과연 그런 말을 했었나」 싶게 민주적이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단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국민의 평가는 결국 「물」과 「우유부단」이었던 것이다. 국민의 노 대통령에 대한 그런 인식은 공보처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국민의 81.5%가 중립내각 구성 선언을 「잘한일」,74.9%가 민자당 명예총재직 사퇴와 당적포기를 「바람직 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대선의 공정한 실시에 기여할 것이라는 의견은 56.8%,현 정국을 풀어나가는데 기여할 것이란 의견은 54.2%로 그 비율이 50%선으로 뚝 떨어지고 있다. 압도적 지지의사를 보여주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을 못하는 이 여론조사의 결과­. 그것은 바로 국민이 지닌 노 대통령의 실천력에 대한 의심,더 나아가 그 순수성에 대한 불확신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올바로 인식하고 있듯이 중립내각 구성선언과 당적포기 그 자체가 정부의 정치적 중립과 공정한 선거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중립내각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인물들로 구성하느냐부터가 문제일뿐 아니라 장관들의 교체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연기군 사건에서 보듯 관권과 금권에 의한 불공정선거는 정부수립 이래의 오랜 관행으로 구조화 되고 체질화 되어 있는 상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기군 사건때 일부 관련공무원들은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되레 불만이었고 조사받으러 가는 도지사를 위해 두줄로 도열하는가 하면 검찰은 국민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 없이 그런 내용의 수사결과를 시침 뚝떼고 발표했던 것이다.
○「중립」 행정조치 필요
이런 팽배한 도덕성과 죄의식의 마비현상을 장관교체와 탈당으로 일거에 제거할 수 있겠는가. 설사 노 대통령이 말 그대로 엄정중립을 지키고 내각 역시 문자 그대로의 중립내각이 된다해도 오랫동안 출세주의와 이기주의에 젖은 정치 공무원들은 새로운 강자를 위한 충성길에 다퉈 나설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이번 결단을 스스로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모험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단지 그것은 우리 정치의 발전을 가져오느냐,정국의 혼돈만을 가져오느냐를 판가름해줄 것이란 의미에서 「모험」인 것만이 아니라 노 대통령의 개인적 앞날과 관련해서도 일대 모험이다. 만약 그의 이번 결단이 아직도 일부 사람들이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다목적적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것은 막판에 스스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또 의도 자체는 순수했다 해도 어떤 원인에 의해 그 결과가 의도와는 달리 나타난다면 그 역시 엄중한 비판을 자청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번 노 대통령의 결단이 정치발전으로 이어지려면 진정한 중립내각 구성도 구성이려니와 과감한 추가적 조처들이 뒤따라야 한다. 중립내각을 구성하고 당적을 포기했다 해도 대통령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이상 이번 결단이 순수한 것이라면 앞으로 공직사회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각종 행정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과감한 인사도 주저말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진척이 가장 느린 정보·수사기관과 같은 권력기구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일은 가장 긴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또한 정부는 권력유지를 위해 거느려왔던 관변단체들과는 이 기회에 연을 끊어야 한다. 아울러 선거 때마다 있어온 선심행정,표모으기 시책 발표도 없어야 한다.
○한번쯤 정면돌파를
비록 임기가 5개월 밖에 남지 않은 대통령이지만 이 모든 일은 하려고만 한다면 대통령의 권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기득권층에선 집요하게 현실과의 타협을 권유할 것이다. 타협은 얼핏 중용의 길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발전과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도 노 대통령이 해야할 일은 그런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고 과감한 개혁의 수순을 밟는 일이다.
남은 길은 이제 정면돌파작전 뿐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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