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예언' 피하려 닮은 꼴 대통령 앉혔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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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광장공포증이 있는 어느 독재자의 이야기'라는 첫 문장에 깜박 속았다. "아, 칼을 무서워한 조폭이 주인공인 '공중그네' 같은 소설이군.".

그런데 진도가 좀 빠르다. 독재자는 점쟁이를 만나 농민들에 의해 죽을거라는 예언을 듣고는 자신과 닮은 이발사를 대통령 자리에 앉히고 유럽으로 도피한다. 여기까지가 겨우 36쪽이다.

그 뒤도 지루하지는 않다. 닮은 꼴 대통령은 슬슬 짝퉁 역할이 지겨워지자 또다른 닮은 꼴을 찾아놓고는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할리우드행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닮은 꼴이 또다른 닮은꼴에게 자리를 넘기는 일은 반복되고, 어느날 진짜 독재자가 돌아온다. 그는 가짜(그는 자기가 찾은 닮은 꼴인줄로 알았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추앙받는 모습을 보고는 총을 쏴 죽이는 바람에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는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소설은 줄거리를 풀어놓는 중간중간 현실과 허구의 내러티브를 뒤섞어 독자를 긴장시킨다. 어느 틈에 브라질 고원지대에 살았던 작가의 실제 경험이 슬며시 들어온다. 저자는 하늘과 땅 사이 그물침대에 누워 뭔가 해야한다는 의무감없이 보낸 시간들이 이 소설을 탄생시켰음을 알려준다. "뭔가 되려는 유혹에 맞서느라 어느 현자가 그런 그물침대를 상상해낸 게 틀림없어요. 내 그물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난 가장 창작력이 왕성한 소설가이면서 가장 비생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423쪽)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마치 이발사 닮은 꼴의 이야기를 훔쳐 만들어진 것처럼 넘어가는 부분도 진실과 거짓이 헷갈린다. 압권은 소설 속 닮은 꼴 이발사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여자를 슬그머니 실존 인물로 바꿔 소설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대목. 그녀가 지은이와 대화하면서부터 이 복잡하고 새로운 이야기의 궁금증이 풀려간다.

구성이 얽히고 설켜 "무슨 소설이 이래"라고 툴툴댈 수 있지만 재치있고 경쾌한 문장에 끌려 쉽게 덮을 수 없는 책이다. 프랑스에서도 초판 12만부가 즉시 매진됐다 한다.

참, 얘기가 남았다. 마지막 반전까지 유쾌하게 즐기기를.

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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