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없다고 “오리발”/복사기 위력에 “들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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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수서·연기폭로 등 「결정적 물증」
「복사기가 사건을 만든다.」
복사기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각종 서류 사본이 대형사건의 결정적인 물증이 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우리나라 선거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한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관권선거 폭로사건이 그렇고,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내각제 합의각서 파문이 그같은 예다.
발뺌과 해명으로 흐지부지되고 「일방주장」으로 묻혀버리곤 했던 과거의 구증시대가 가고 「복사증거시대」가 온 것이다.
관권선거 폭로사건이 「인사불만에 의한 억지주장」이라는 당국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공감을 얻으며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한씨가 선거당시 작성된 각종 자료를 복사,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직접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씨가 공개한 사본은 3월15일 이종국충남지사로부터 선거용 자금으로 직접 받았다는 수표 1천만원 외에 선거지침서 사본 등 모두 15종.
▲친여지지 성향이 ○×로 표시된 관내 직업·직능별 명부(일부) ▲관내 야당성향인사 명부 ▲읍·면단위로 총책임관제(군과장급),이단위로 책임분담제(군공무원 1명과 읍·면공무원 1명) 등을 명시한 공무원 선거배치표사본 등 이들 복사물은 검찰수사의 기초자료가 됐다.
사본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지난해 2월의 「수서특혜」사건은 청와대비서실·평민당이 서울시장·건설부장관에게 보낸 민원처리 협조 공문 사본이 공개되면서 쟁점화돼 결국 정·관·재계의 거물들이 굴비엮이듯 구속됐다.
90년 10월에는 민자당 창당전당대회직전 당시 최고위원인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자 명의로 「1년이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는 합의문 사본이 유출돼 정치권에 한바탕 회오리를 불러일으켰었다.
복사기의 힘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올 2월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뇌물감정사건의 경우 사설감정인 등은 「일」이 뒤틀어질때 돈을 되받기 위해 건네준 수표를 복사해두고 「위협영수증」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검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심지어 최근 뇌물공여혐의로 검찰에 적발된 모회사 사장은 거액의 수표를 건네줬는데도 민원이 잘 해결되지 않자 팩시밀리로 수뢰공무원에게 수표사본을 보내 독촉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오영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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