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짚신발 기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옛날엔 신문기자라 해 봤자 짚신 신고 도시락 싸갖고 다니며 기사거리를 찾아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게 일이었지. 그 일패들이 매일 시간을 정해 마루노우치(丸の內.일본 왕궁 근처의 지명) 들판의 큰 나무 아래 모여 도시락을 먹으며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는 거야."

일본신문협회가 펴낸 논문집에 인용된 한 원로 기자의 생전 회고담이다. 때는 1870~80년대, 기사거리 자체가 많지 않고 통신 수단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일용할 양식이 궁했던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일본의 관청.기관별 출입기자 모임인 '기자클럽'의 원형이다.

짚신발로 들판을 떠돌던 기자들이 '기자실'이란 공간을 확보한 건 1890년 일본 제국의회 개설 때다. 선거로 소집된 사상 첫 의회였지만 기자들의 방청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기자들은 '공동신문구락부'를 결성하고 교섭한 끝에 상주 취재를 허락받았다. 이후 관청별로 속속 기자클럽이 생겨났다. 탐탁지 않았던 관청들은 인력거꾼이 쓰던 문간방을 기자실로 내 준 경우가 많았다. 지금 쏟아지는 비판과는 달리 기자실의 탄생은 언론 자유와 알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이렇게 생겨난 기자클럽은 한국 '출입기자단'의 모델이 됐다. 서양에선 보기 드문 이 제도의 문제점은 그동안 수없이 지적됐다. 관청이 공개하는 자료를 기사화하는 데 익숙해진 기자들의 비판정신이 무뎌지고 독자적인 뉴스 발굴에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문 지면에서 기자들의 발 냄새를 맡기 힘들고 신문마다 별 차이가 없는 붕어빵 신문이 된다는 비판이 일었다. 기자단 소속이 아닌 군소.신생 언론이나 외국 기자들에 대한 진입장벽 문제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일본의 기자클럽은 지금도 건재하다. 만약 출입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나가겠다고 하면 공무원들이 먼저 나서서 말릴 것이 뻔하다. 감시의 눈을 번뜩이는 기자들의 상주에 따른 불편보다는 정부가 알리고 싶은 내용을 원하는 방향으로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기자실은 몰라도 부처별 브리핑 룸까지 통폐합하겠다는 건 기자들과의 접촉은 물론 정보공개 자체를 최소화하겠다는 발상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120년 전 정보에 굶주렸던 일본의 짚신발 기자들이 의회 취재권을 따내기 위해 함께 뭉친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그건 '담합'이 아닌 '단합'이었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