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미 FTA 협정문 분석 감춰둔 독소조항은 안 보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호 19면

25일 김종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우리 측 수석대표가 협정문 내용이 적힌 책자를 들고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공개한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은 협상 타결 직후 양국이 발표했던 내용과 다른 게 없다. 어떻게든 협정문을 이 잡듯이 뒤져 타결 때의 발표문과 다른 걸 찾아내 한ㆍ미 FTA를 반대할 명분을 찾으려 했던 이들이 섭섭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타결 발표 때부터 관심이 모아졌던 점을 차근차근 점검해 보자.

먼저 개방과 관련해서는, 배기량 기준으로 돼 있어 수입을 제한했던 우리의 자동차 세제를 바꾸기로 하는 대신 미국 자동차 시장을 대폭 열기로 한 것은 그대로다. 자동차세를 배기량 기준으로 다시 강화해 자동차 수입을 막지 않겠다는 약속이 문서화되었을 뿐이다. 이것을 조세주권의 포기라고 공격하는 것은 군색해 보인다.

열기 힘든 미국 섬유시장을 더 열기로 하고 대신 원산지 규정을 빡빡하게 따지기로 한 것도 바뀌지 않았다. 원산지 규정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 많은 생산 정보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절차를 글로 명확히 했을 뿐이다.

김정수 경제 전문기자

또 쌀 같은 민감한 품목은 아예 열지 않고 축산물 등 덜 민감한 품목도 한동안은 수입 물량을 규제하면서 서서히 물량을 늘려 15년 뒤에나 완전 개방키로 한 것도 그대로다. 단지 낮은 관세로 수입하는 물량을 매해 얼마만큼씩 늘릴지 명문화해 뒤탈이 없게 했다.

다음으로 많은 국내 전문가들이 개방해야 한다고 했으나 각 부문의 반발과 경쟁력을 감안해 개방 수준을 낮췄던 서비스 부문도 협상 타결 때 발표한 것과 내용이 같다. 다만 위기가 닥쳤을 때 금융통제를 한 해 안에 끝낼 것을 글로 못 박았다. 우리처럼 경제정책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라에는 명문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탓일 것이다. 어쨌든 개방과 보호의 범위와 강도에 관해서는 새로운 게 없다.

제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적재산권 보호의 강도를 높이기로 한 것은 일관된 방향이다.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겠다는 말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니, 영화관에서 복사물을 찍거나 대낮에 버젓이 해적판을 내놓고 파는 것을 단속해야 한다는 내용을 협정문에 못 박았다.

노동과 환경 기준을 잘 지키기로 한 것,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제소를 걸 수 있으나 환경ㆍ보건ㆍ부동산 정책 등은 제소거리로 삼을 수 없게 한 것도 타결 때와 같다. 다만 투자자-국가소송과 관련해 조세정책 부문에선 아무것이나 제소 대상에서 빼주는 게 아니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재산에 직접적 손실을 끼치는 내용은 피소될 수 있다고 명시한 점이 흥미롭다. 조세정책 전체를 제소 대상에서 빼면 한국 정부가 또 언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이상한 세금제도를 만들지 모른다는 불신 때문에 마련된 조항으로 보인다. 부동산정책에 대해서도 유사한 조항이 있었으면 더 나을 뻔했다. 부동산 규제 전부가 제소 대상에서 빠지는지, 어느 부분이 제소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등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훗날 탈이 생길 여지를 남겨 놓았다.

반덤핑조치는 미국 국내법 절차 그대로 하겠다거나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등으로 여러 나라의 수출품을 규제할 때 한국 수출품을 특별 고려해 주기 힘들다는 것 등도 변하거나 다른 내용이 없다.

이렇게 보면 내용에 있어서는 협상 타결 내용과 이번 발표된 협정문 간에 차이가 없고 단지 품목과 숫자, 제도의 시행 내용과 기간, 그리고 절차까지 모든 걸 드러내 문서화해 훗날 왈가왈부할 소지를 거의 없앴다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한ㆍ미 FTA 협상 결과가 “양국의 국내 찬반 여론과 경제여건 등을 감안할 때 상대편 시장 개방과 자기 시장 보호 양 측면에서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당초의 평가가 달라질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것으로 밀실협상이니 이면계약이니 하는 억측이나 논란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 앞으로 해야 할 과제나 잘 챙길 일이다. 이젠 어떻게 하면 겨우 지핀 불씨를 살려 큰 무리 없이 한ㆍ미 FTA 협정을 합의한 대로 비준할지, 또 FTA에 따르는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그 혜택을 극대화할지(구조조정이 그 핵심), 정부와 국회ㆍ국민 모두가 중지를 모아야 할 때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다음번 대통령을 하겠다는 이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협정문이 밝혀졌으니 ‘협정문을 보고 무엇이 국익일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식의 모호한 입장은 더 이상 취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한ㆍ미 FTA뿐 아니라 줄줄이 추진되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의 FTA에 대해 입장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몇 달 뒤 국민들은 FTA를 둘러싼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 이들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투표장으로 향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