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노무현 정부 막판에 뭘 노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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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워싱턴 특파원 때 이 광경이 신기했다. 홍보 자료만 돌리고, 곤란한 질문이 쏟아지면 손사래를 치면서 사라지는 대변인들을 한국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미국 기자에게 물어봤다. 그가 말했다. "대변인은 기자들이 궁금한 게 없을 때까지 서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기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답변하는 거잖아."

2005년 11월, 백악관 대변인은 스콧 매클렐런이었다. 그는 브리핑에서 "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은 '리크 게이트'와 관련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뒤늦게 관련 사실이 드러나 리비는 기소됐다.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땐 나도 몰랐다"고 하면 되니까. 하지만 미국 기자들은 "백악관 연단에서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며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그 장면을 의회방송(C-Span)에서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특파원으로 몇 년 살면서 미국의 많은 문제점을 알게 됐다. 지지자들에겐 죄송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는 걸 보고선 "참, 미국이란 나라…" 하고 혀를 찬 적도 있다. 하지만 미국이 민주주의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가 있다. 언론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만평은 걸핏하면 부시 대통령을 원숭이처럼 묘사한다. 부시를 비판하는 뉴욕 타임스 사설은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다. 그만큼 독하다. 하지만 그 어떤 미국 정치인도 비판 언론을 비난하는 걸 보지 못했다.

섹스 스캔들로 언론에 죽도록 두드려 맞은 빌 클린턴 대통령. 그는 "언론의 비판 기능 때문에 행정부가 건강해진다"고 예찬론을 폈다. 진짜로 예뻐서는 아닐 것이다. 단지 언론이 대변하는 국민 앞에 겸손했을 뿐이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집권 기간 내내 기회만 닿으면 언론을 공격했다. 모든 게 언론 탓이었다. 그게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걸 이젠 알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심하다.

한번 따져보자. 집권 여당이 대선 후보도 못 정하고 눈만 뜨면 서로 "네 탓"이라며 삿대질하는 이 상황은 언론 때문인가. 일본에선 대학생 96%가 취업하는데 한국에선 청년백수가 넘쳐나는 건 신문의 왜곡 보도 탓인가.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고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돼 가는 건 또 누구 탓인가.

정부의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22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언론 입장에선 이름 자체가 모욕적이다. 37개의 중앙부처 기사송고실을 3개로 축소하는 게 어떻게 취재 지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기자가 있다면 아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이 제도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두 안다. 지난 1월 노 대통령이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를)담합하고…" 하는 발언을 한 뒤 청와대와 국정홍보처가 만들어 냈다. 정부 부처 공보관 상당수가 반대하는데도 밀어붙였다. 그래 놓고 "기자들에 대한 지원을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따위의 말을 하니 기가 막힌다.

국정홍보처와 청와대에서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은 기자 출신이다. 나도 그들과 선후배의 좋은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민망하다. 도대체 앞으로 후배들을 어찌 보려고 이러시는가.

한나라당과 민주당, 민노당까지 이 제도를 비난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을 제외한 전부다. 그러니 노 대통령의 후계자가 정권을 잡지 않는 한 이 제도는 원 위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집권 말기에 노 대통령과 측근들이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지 납득이 안 된다. 할 일이 그리 없는가. 아니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켜 지지를 받더니 자신감이 생겼나. 그도 아니면 언론에 재갈을 물려 연말 대선에 이용할 속셈인가. 잘 모르겠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정부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