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의 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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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36년 8월9일과 1992년 8월9일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56년전 그날 우리의 손기정선수는 히틀러를 포함한 7만여 관중들의 우레같은 환호를 들으며 베를린올림픽의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섰다. 새삼 다리에 솟구치는 힘을 느끼며 그는 결승점을 향해 1백m 스프린터처럼 돌진해 나갔다. 가슴에 와닿는 결승테이프. 『아 내가 이겼구나. 드디어 해냈구나. 어머니 감사합니다­.』 2시간29분19초2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감격의 순간도 잠깐. 그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시상대에 올랐다. 금메달이 목에 걸려지고 월계관이 머리에 얹혀져도 그는 기쁜줄 몰랐다. 가슴에 단 붉은 마크와 국기게양대에 오르는 일장기,그리고 장내에 울려 퍼지는 일본 국가를 들으며 그는 고개 숙여 울었다. 「아 조국­」,그는 그때처럼 자신이 마라톤선수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손기정선수의 한이,아니 우리 겨레의 한이 56년만에 드디어 바르셀로나올림픽의 마지막날 6만5천여관중이 지켜보는 메인스타디움에서 풀렸다. 22세의 황영조가 선배의 한과 겨레의 한을 한꺼번에 속시원하게 풀어준 것이다. 그것도 마지막까지 시소를 벌이던 일장기를 단 일본선수를 뿌리치고 말이다. 얼마나 장하고 감격스러운 순간인가. 돌이켜보면 이번 바르셀로나올림픽은 「한국을 위해 벌인 한마당 잔치」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 25일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여자공기소총에서 우리의 여갑순선수가 최초의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고 애국가가 울려퍼지게 한 것도 예삿일이 아닌데 폐회식을 앞둔 마지막 경기,때문에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마라톤에서 또다시 우승,전세계 수억명의 TV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가 바르셀로나 하늘높이 높이 올라가고 애국가가 자랑스럽게 연주된 것은 그야말로 한국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이번에도 금메달 12개를 따내 종합순위 7위를 차지했다. 그 12개의 금메달에 얽힌 감격의 순간 순간들은 지금 되새겨봐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모두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올림픽의 금메달을 생각하다가도 우리 정치판의 「양김」을 생각하면 새삼 가슴이 답답해진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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