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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의 구조적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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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의 퇴진 파문은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제기구의 구조적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세계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개발도상국들은 이번 사태 내내 침묵을 지켰다. 유럽 국가들도 세계은행의 주도권을 미국이 쥐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미국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퇴진의 결정적 이유는 세계은행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는 여자친구 샤하 리자에게 승진과 보수에서 특혜를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울포위츠 총재가 취임 이후 보여준 거만한 행동의 일부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미 국방부와 국무부 관료로 재직할 때 그리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국방부 부장관 시절 이라크 전쟁을 주도했다는 오명도 뒤집어썼다. 이런 좋지 않은 인상도 그가 세계은행 총재 직을 제대로 수행했으면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총재 취임 이후 조직 내에 자신의 파벌을 형성했으며, 비판적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가 영입한 일부 인사는 자신의 상관을 건너뛴 채 울포위츠 총재에게 바로 보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세계은행을 떠나는 인재가 줄을 이었다.

세계은행은 기관 운영비로만 연간 8000만 달러(약 750억원)를 사용하는 거대한 조직이다. 이사회는 24개국에서 추천한 이사로 구성돼 있다. 기금을 가장 많이 내는 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은 상임이사국으로 당연직 이사를 보내고 있다. 나머지 19명의 이사는 격년제로 선출된다.

세계은행에는 이사회뿐만 아니라 감사위원회.고충처리위원회.평가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위원회는 이번 파문에서 아무런 감시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다.

퇴진 압력이 거세지던 와중에도 미국 출신 이사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물론 울포위츠 총재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뒷짐만 진 것은 문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세계은행에 연간 10억 달러(약 9400억원)의 기금을 내는데도 칭찬은커녕 욕만 얻어먹게 됐다.

유럽 국가들도 팔짱을 끼긴 마찬가지였다. 퇴진 압력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서야 뒤늦게 가세했다. 그 이면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있다. 세계은행과 반대로 IMF에서는 유럽의 영향력이 미국보다 센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이 세계은행 문제를 건드렸다가 괜히 불똥이, 자신들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IMF에도 튈 수 있다는 걱정을 한 것이다. 브릭스(BRICs)로 불리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이나, 거액을 빌린 아프리카 국가들도 이번 파문의 방관자로 머물렀다.

이번에 세계은행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점이 다른 대부분의 국제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는 게 더 심각하다. 이는 국제기구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출범했기 때문이다. 무려 60여 년 전 만들어진 기구가 국제사회의 현안을 재빨리 처리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특히 세계은행과 IMF와 같은 경제 관련 국제기구는 자본 이동의 국경이 사라진 현재 상황에서 그 기능에 대한 비판을 더욱 많이 받고 있다. 그래도 공공재.환경.빈곤 문제에서 국제기구가 힘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다. 경박한 상업자본이 여러 국가의 경제를 뒤흔든 상황에서 이에 걸맞게 국제 경제기구의 기능도 변해야 한다.

울포위츠 총재가 다음달에 퇴진하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세계은행 문제는 당분간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구조적 문제가 향후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낡아빠진 국제기구를 대체하겠다는 새로운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가 늦어질수록 실패는 커질 수밖에 없다. 국제기구는 지금 위기다.

데베시 카푸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정리=강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