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론 - 윤리의 상투성에 맞서는 지독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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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11면

흔히 이창동의 영화는 ‘지독하다’고 한다. 그토록 지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세상의(또는 영화의) ‘상투성’과 맞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단지 스타일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또는 영화의) 근본적인 윤리상의 상투성이라는 문제와 대결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그는 세상의(또는 영화의) 언어와 논리가 지닌 상투성 밖으로 초월하려 하지 않고, 그 상투성 ‘안’에서 그 상투성과 싸우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 끈질기고 지독한 질문의 무게를 온전히 ‘인물(캐릭터-배우)’ 위에 싣는다. 그의 ‘인물들’은 늘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다. 깡패-살인자이자 동시에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막둥이이고(‘초록 물고기’), 역사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고(‘박하사탕’), ‘미친 것도 아니고 안 미친 것도 아닌 놈’(‘오아시스’)이다. 우리는 세상의(또는 영화의) 상식적인 ‘이분법’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가장 핍진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밀양’은 그 질문-싸움을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밀고 나간다. 누아르라는 장르의 화법, 역사의 상처와 치유라는 시대적 화제, 이 모든 것을 벗어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던지는 질문. 잔인하게도, 미칠 수도 미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가냘프고 연약한 신애-전도연이라는 인물의 몸과 눈을 빌려서 던지는 질문. 그러나 그/그녀는 끝내 초월하기를 거부한다. 하늘을 향해 던지는 그 절망 어린 회의의 눈빛은, 이 세상에 대한 강한 긍정인 한 줌 햇빛이 되어 밀양-종찬 앞에 내려앉는다. 돌이켜 보면 이창동 영화의 끝에는 언제나 그 한 줌 햇빛(막둥이 집 마당, 영호의 얼굴, 공주의 방바닥)이 있었다. ‘밀양’에서 그 햇빛은 그 어느 때보다 늦게-멀리에서 나타난다. 그 어느 때보다 누추하고 건조하고 볼품없는 그 햇빛은, 그만큼 지독한 이창동의 ‘개똥밭’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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