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의 「잡지살리기」/조현욱 문화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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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체제비판적 시사월간지 『사회평론』이 빚을 청산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본지 17일자,일부지방 18일자 13면 보도)은 「돈내는 일에는 뒤로 빠지게 마련」이라는 학자들에 대한 통념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지난해 5월 진보진영의 통일전선 역할을 자임하며 창간됐던 『사회평론』은 이념서적의 쇠퇴추세에 따른 판매부진으로 2억원에 가까운 빚이 쌓이면서 존폐 위기에 빠졌었다.
대부분 대학교수로 이뤄진 편집위원들은 『우선 빚부터 갚고 새 활로를 모색하자』며 각자 사재를 털어 1억2천여만원을 모았다.
지난 90년 한길사의 『사회와 사상』이 폐간되자 「진보이념의 대중적 확산을 위한 포괄적 논의의 장」이 있어야 한다는 진보학계의 여론에 따라 1억5천여만원의 기금을 마련해 창립됐던 『사회평론』이었다.
이제는 망해가는 이 잡지를 살리기 위해 2백만원에서 2천만원에 이르는 성금을 낸 사람들은 출판사사장,민변의 변호사 1명을 제외하면 젊고 별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학자들이다.
집 한칸 없이 전세살면서 2백만원을 낸 C교수,1천만원을 낸 K교수,은행 융자를 얻어 2천만원을 낸 P교수 등이 그들이다.
교수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 1억원이 넘는 돈을 마련한 것은 몹시 드문 일이다.
되찾을 길이 전혀 없는 돈을 가난한 선비들이 내놓게 만든 것은 원고료 한푼 받지 못하고 글을 쓰고 홍보하게 했던 힘,진보이념과 이를 전달할 잡지에 대한 애정이다.
이 정도의 자금이면 현체제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만 상업적 경영에는 서툰 자신들이 또다시 적자를 쌓게 된다면 잡지의 명맥이 아주 끊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편집진들은 여러 출판사와 합작하는 주식회사 형태로 재창간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을 보면서 이달초 경주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정치학회 하계학술대회의 낯뜨거운 해프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선거 후보들을 초청해 비용을 물린 호화판 행사에서 『선비는 공짜술을 좋아한다』며 2차를 사라던 P교수,『정치학자를 중용할 계획을 밝히라』던 M교수 등이 그들이다.
학계에서도 주류가 아니고,관에서도 곱게 보지 않으므로 연구비가 보탬이 되는 용역은 여간해 맡을 수 없는 학자들과 돈·권력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도덕적 정열과 세속적 욕망사이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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