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노는 경험도 사업 밑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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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 수사가 일단락되고 있다. 사건의 공방 외에도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부분이 있다. ‘도대체 21살짜리가 왜, 어떻게 가라오케에 갔을까?’ ‘도대체 자식교육을 어떻게 시키기에 대학생이 강남의 가라오케를 출입하는가?’

사람들의 의문에는 분노도 담겨 있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유학생인 ‘젊은 친구’가 가라오케나 다니고 그러니까 사고 치는 것 아니냐는 투다. 재벌가의 자녀교육이 어떻기에 어린애가 그런 사고를 치고 다니느냐는 비판이 많다. 심지어 어떤 재벌 집안에서는 아들에게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는 말이 들린다.

그동안 재벌가의 교육은 단편적으로 흘러나왔다. 이병철 고 삼성그룹 회장이 자식들에게 ‘항상 경청하라고 했다’거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새벽 5시에 자택에서 자식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며 근면 교육을 했다’는 것 등이다. 이렇게 알려진 것은 공식적인 교육현장이다.

하지만 사업가들에게 항상 공식적이고 우아한 삶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업은 진흙탕 싸움이다. 돈이 있는 곳에는 항상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업가를 키우는 집에 ‘공자왈 맹자왈’만 있을 수 있는가? 때문에 사업가의 집을 보면 공식적인 교육 외에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교본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교육에 의해 터득된다.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은 “자녀들에게 공부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여행이나 해외 봉사활동을 통해 세상을 넓게 보는 법을 가르친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회장의 장남은 고등학생 때 이미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경험했고, 최근엔 몽골이나 마추픽추 등지로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둘째딸 역시 인도의 고산 지대에서 한 달 반 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이런 식의 체험교육은 재벌들이 가장 선호하는 교육방식이다.

“술집도 가봐야 한다”

지금은 원로 대접을 받는 재계의 A회장은 자식들이 젊었을 때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두고 봤다고 한다. 실제 그의 자식은 음주가무에 능했고, 주색잡기도 섭렵했고 해외 원정도 자주 다녔다. 일반인들이 들으면 위화감을 느낄 만한 행동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A회장은 아들의 그런 행동을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물의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두고 봤다. 이유는 한 가지다. ‘사업을 하게 되면 별의별 상황을 다 겪는다. 똑똑한 교수도 만나지만 사기꾼도 만나고, 우아하게 와인도 마시지만 철없이 음주가무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경험은 일찍 할수록 좋다. 풍파를 다 겪고 나서 사업을 해야지 사업하다가 그런 잡기에 빠지면 회사가 위험해진다. 술이 좋으면 술을 실컷 먹고, 노는 게 좋으면 실컷 놀고 그래서 그게 별것 아니라는 걸 알면 그때 사업을 해라.’

모름지기 사업가란 경험이 많을수록 좋다는 뜻이고, 사업하다가 한눈팔지 말고, 실컷 한눈팔고 나서 사업에 전념하라는 메시지다. 실제 A회장의 아들은 지금 그룹회장으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다른 한 중견기업의 사장도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어쨌든 자식들이 돈 많은 환경에서 자랐어요. 그러면 주변에서 이런저런 유혹이 많습니다. 꼬드기는 사람도 많고요. 그럴 때마다 내가 나선다면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회사는 그냥 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켜보는 거죠. 술집도 가보고, 같이 간 사람 중에 술 얻어먹으려고 잘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그래야 되죠. 술집을 권하는 게 아니라 사업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을 연습하는 겁니다.”

일반인들은 수긍이 안 가겠지만 이런 이유로 재계의 2세 교육에서 술집 출입을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못하게 막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이런 교육적 의도 없이 그냥 자식이 몰래 술집을 출입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보스형 오너인 김승연 회장의 성격상 자식들이 술집에 드나드는 걸 알았어도 문제 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돈 많은 집의 자식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관계와 사람 사귀는 법이다. B회장도 미국 유학시절 공부보다는 주변에서 사람 관찰하는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B회장과 같은 학교를 나온 한 기업인은 “당시 그는 공부보다는 그곳으로 유학 온 한국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지냈다. 지금 보니 그때 똑똑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그 그룹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실제 재벌가 자녀들이 외국 유학을 가는 이유도 대부분 그 커뮤니티에 들기 위해서다. 재벌은 아니지만 해외 공관에서 근무하는 한 대사는 아들을 현지 명문대학에 입학시킨 것을 자랑했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을 잘 사귀어 놓으라”고 말했다. 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앞으로 그 나라를 주름잡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이유로 현지에서 유학생활을 같이한 일반 학생들은 재벌가나 부잣집 유학생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다. 공부는 뒷전이고 놀기만 한다는 평이 많다. 이런 습관이 한국에 와서도 이어지다 보니 술집 출입이 잦은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튼튼히 갖추는 것은 해외 명문가들의 교육 지침에도 나온다. 미국의 케네디가는 하버드대 인맥의 본산으로 불릴 만큼 하버드대 인맥이 넓다. 빌 게이츠 역시 주변호인협회 회장을 지낸 아버지 덕에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고급 문화 강조

지금 재벌 회장 중에도 젊었을 때 어긋난 행실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사람이 많다. 하지만 기업을 맡은 후 성공적인 경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괴벽에 가까운 술버릇을 가진 오너들이 있지만 기업 경영은 큰 무리 없이 하고 있는 총수도 있다.

재계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일반인들은 경영자도 도덕군자이기를 바라지만 기업 경영의 핵심은 경쟁력과 사업성과”라고 전제한 뒤 “그것을 알고 있는 오너들은 자식들에게 기업 경영에 관한 스트레스는 많이 주는 대신 그 외에는 자유를 주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자율은 아니다. 근면과 절약이 몸에 배게 철저한 교육도 병행한다. 고 정주영 회장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요즘에도 자식을 혹독하게 다루는 사람도 많다. 한 건설사 C회장은 지금도 오전 7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일한다.

대표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의 C회장은 자신과 달리 자식은 미국에서 공부까지 했지만 자식에게 70년대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아들은 계열사 사장이지만 외국 출장 때도 비행기는 이코노미클래스를 탄다. 회사 관계자는 “아들이 아버지의 교육 방침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이런 성향은 자수성가한 부모일수록 크다. 창업을 해본 사람이면 대부분 자식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한다. 창업 50년이 넘은 한 중견기업의 D회장은 지금도 자식의 출퇴근 시간을 챙긴다. 사장이라고 아무 때나 출퇴근하면 직원들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것이 노(老)회장의 생각이다.

80이 넘은 D회장은 회사 경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지만 자식의 품행은 아직도 체크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80년대 금융그룹으로 전성기를 이뤘던 F회장은 스스로 좁은 사무실을 쓰고, 개인 비서를 쓰지 않을 정도로 근검 절약했다. 30년간 오전 6시 출근을 고집했던 덕에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아들은 6시 출근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창업주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2세, 3세로 승계가 이뤄지면서 자식 교육도 점점 화려해지고 있다. 내핍이나 근면보다는 글로벌과 고급 문화가 강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더러 발생한다.

두 아들을 유학보낸 한 그룹 회장은 “외국에 자식을 보내 놨는데 문제가 없을지 항상 걱정”이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재벌가의 아버지들은 세련된 교육이 자칫 방종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석호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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