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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징비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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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런데 400년도 더 된 '징비록'을 읽노라면 기가 막힌 대목이 적잖다. 먼저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서울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20일이었다. 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보병의 최고 속도로 그냥 쭉 걸어서 온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진군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4월 30일 새벽에 임금(선조)은 서울을 포기하고 몽진(蒙塵)에 올랐다. 임금의 가마는 백성들의 곡성을 뒤로 한 채 야반도주하듯 대궐을 빠져나와 동이 틀 무렵 사현(무악재)을 넘었다. 이때 남대문 안의 큰 창고에서 불이 나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뻗쳤다. 서울을 버리고 간 임금과 조정에 대한 민초들의 분노의 불꽃이었다. 사수할 의지가 없는 임금과 조정을 백성이라고 존중하고 지킬 턱이 없었다.

백성의 통곡을 하늘이 아는지 임금을 태운 가마가 석교에 다다랐을 때부터 비가 내리더니 벽제역을 지날 즈음 빗줄기가 굵어져 혜음령을 지날 때엔 퍼붓다시피 했다. 마산역을 지나 임진강 나루로 갈 즈음 밭에 있던 촌부가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라가 우리를 버리고 가니 이제 누굴 믿고 산단 말이오." 민초들이 마음 둘 곳 없는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선조는 명나라와의 국경이었던 의주까지 파천(播遷)했다. 여차하면 국경을 넘을 판이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함은 물론 심지어 우리나라를 합병해 달라고까지 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지 못한 나라의 비애였다.

이듬해인 1593년 정월에서야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만여 명의 명나라 원군을 앞세워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4월 20일, 1년여 만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성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었고, 굶주리고 병들어 차마 눈뜨고 볼 수조차 없었다. 거리마다 인마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심지어는 부자와 부부가 서로 뜯어먹기에 이르렀고(至父子夫婦相食), 길가엔 뒹구는 뼈들이 짚단같이 흩어져 있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런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잡혀 있던 선조의 장자 임해군은 자신이 풀려나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디든지 왜국의 요구대로 떼어 주자고까지 했다. 당시 세자 0순위였던 임해군이 자기 한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긴커녕 적장에게 나라 절반을 떼어 줄 테니 목숨만 부지해 달라고 구걸했던 것이다.

이처럼 아픈 기록인 '징비록'을 1996년 2월에 읽고 최근 다시 읽었다. 그 1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뒷근심은 되레 커졌다. 제대로 '징비'하지 않은 탓이다. 책은 때로 세월의 무게만큼 읽힌다. 뼈저린 반성과 질책, 그리고 후대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담긴 서애의 유언 같은 '징비록'이 더 무겁게 읽힌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비단 나라만이 아니다. 기업도, 가정도, 개인도 '징비'의 날선 긴장감으로 다시 다잡아야 한다. 휴전선 철책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 삶의 최전선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나와 우리의 징비록'을 다시 써야 한다. 바로 지금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