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분당 불안감 … 이회창 "상처 깊으면 단일화해도 고전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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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경선)에도 (내가) 감정적으로 싸우는 듯 보였나?"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가 8일 그의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불쑥 물었다. 감정 대립으로 치닫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격돌을 염려하면서다.

이 전 총재는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대선 후보 경선을 치렀다. 2002년에는 일방적 독주였지만, 97년엔 아홉 주자가 나서 '9룡(龍)'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이인제 당시 후보가 경선에 불복, 탈당한 일도 있었다.

그는 "당시엔 후보들 간 (직접 격돌은) 피했는데…"라고 아쉬워했다. 이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당이 깨지거나 하는 상황이 돼선 안 된다"며 "극단적인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겠지만 정권 교체를 바라는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고 걱정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이 직접 만나 격돌한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이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게 놀랍다. 그런 건 정말 안 좋다. 상처가 깊으면 단일화 해도 고전할 수 있다."

-중재 역할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나.

"역할은 뭐…. 다만 정권 교체가 돼야 한다는 여망 때문에 당이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걱정하는 게 역할이라면 역할이다. 두 사람 다 경쟁심 때문에 주변에서 하는 말이 잘 안 들릴 수 있다. 귀를 넓게 열고 잘 들어야 한다. 특히 캠프 사람들은 싸움하기 쉬운데, 자제시켜야 한다. 다른 상황이면 충분히 알 사람들인데 정작 당사자가 되면 안 보이는 수가 있다. 그게 걱정이다."

-두 사람 중 누구라도 한나라당 후보만 되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 있는데.

"원래 경선으로 단일화만 이뤄지면 집권이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4.25 재.보선 이후 그것도 약해졌다. 어쨌든 나는 낙관론에 근거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상대방이 나와야지, 그러지 않는 한 (낙관론은) 뜬구름 같은 것이다."

-범여권 일각에선 한나라당 후보에 맞춰 '맞춤형 후보'를 낸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정도로 후보군이 풍부한가? (범여권이) 깜짝쇼를 벌이고 의표를 찌르는 후보를 내 국민의 관심을 휩쓰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국가 지도자가 감정과 감상에 의해 뽑힐 수 있다는 얘기다. 당이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데 많이 약해졌다. 답답하다."

고정애 기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8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향해 "원칙을 걸레로 만드느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3일 '3자회동'에서 보여준 이 전 시장에 대한 공격보다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경선 룰을 얘기하면서다. 박 전 대표는 2004년 4월 이 방송에서 진행자인 손석희 아나운서의 공격적인 질문에 "저하고 싸우자는 거예요"라고 말한 바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3자회동'에서 경선 룰 얘기를 하지 않기로 했는데 박 전 대표가 이를 어겼다고 한다.

"아니다. 있지도 않은 이런 억지 주장을 하는 게 문제다. 자꾸 룰을 흔드는 것은 어떤 개인에게 유리할지 몰라도 당으로선 굉장히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다. 경기하다가 선수가 맘에 안 든다고 룰을 바꿔 달라는 게 세상에 어딨냐."

-결국 양측이 갈라설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우려가 있다.

"경선 룰 문제는 어떤 것이 정도이고 원칙이냐로 얘기해야지, 양비론으로 갈 문제가 아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당시 폐지는 안 된다며 싸웠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냥 있어야 했나."

-양측이 서로 이기겠다고 주장하고 있어 양보가 어려운 것 아니냐.

"누구의 유.불리를 떠나 당헌.당규에 따라 하자는 것이다. 당원과 일반 국민의 참여 비율을 5대 5로 하자는 것은 제가 주장해서 2002년부터 시행해 온 당의 원칙이다. 그 취지는 당원과 국민이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자는 것인데 마치 결과가 동등하게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날 박 전 대표는 강 대표의 중재안을 "당 대표의 입장"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래서 당 일각에선 박 전 대표가 강 대표를 의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3자회동' 하루 전인 3일 강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 측의 좌장 격인 이재오 최고위원이 만났는데, 이를 놓고 '비밀 약속'을 했다는 소문이 당내에 돌고 있는 게 '강 대표 의심설'의 근거로 제시된다.

당 관계자는 "강 대표는 박 전 대표의 지원으로 당 대표에 올랐고, 박 전 대표는 4.25 재.보선 참패 후에도 강 대표 체제를 보호해 줬다"며 "그런 강 대표가 이 전 시장 측에 유리한 안을 들고 나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만큼 박 전 대표가 강 대표를 압박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경선 룰' 논란이 정리된 뒤 검증 문제도 짚어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대선에서)두 번 졌는데 세 번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며 "검증을 철저히 해야만 본선 경쟁력이 있는 후보를 내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용호 기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경선 룰) 원칙을 걸레로 만드느냐"고 공세를 퍼부은 직후인 8일 오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노인복지 정책을 발표했다. 모든 치매.중풍 환자를 보험 대상에 포함시키고, 보험료 본인 부담 비율도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서울 성동구의 시립 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를 찾은 자리에서다.

그는 오후엔 서울 종로 영풍문고에서 자신의 수필집 '어머니' 사인회를 했다. 여의도에서 있은 인터넷 기독교 신문사 '뉴스미션'이 주최한 '대학생 기자 아카데미'에서 한 학생이 독도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자 "생떼를 쓰는 사람에게는 무응답이 좋은 수"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박 전 대표의 공세에 맞대응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나.

"누구나 자기 이야기는 할 수 있는 거다."

-경선 룰에 대한 입장은.

"시대정신이 잘 반영돼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갔으면 좋겠다. 우리 당이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느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는 "일일이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이 볼 때 좋지 않다. 대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민심의 반영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선 룰이 확정돼야 한다'는 주장을 '시대정신 반영론'을 통해 드러냈다.

◆ 내일 대선 출마 공식 선언=이 전 시장은 말을 아꼈지만 캠프의 좌장 격인 이재오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에게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기자가 박 전 대표의 '걸레 발언'에 대해 입장을 묻자 "누가(원칙을 걸레로 만들었다는 소리냐)?… 자기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박 캠프에선 10일 중앙선관위에 예비 후보 등록을 하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서승욱 기자


이명박-박근혜 충돌을 진정시킬 책임을 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이르면 10일께 양측의 입장을 고루 반영한 중재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강 대표의 한 측근은 8일 "대표가 이번 주중에 합리적인 중재안을 제시할 것"이라며 "지금은 여러 대안 중 선택의 문제만 남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재안의 핵심은 '빅2'가 첨예하게 맞붙은 여론조사 반영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데 있다. 현재 대표실 주변에선 ▶투표 참여율이 높은 대의원 투표율 적용▶대의원-당원 투표율의 평균치 적용▶여론조사 반영표 최저치(70~80%) 보장▶선거인단을 23만7000명으로 확대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박 전 대표가 이날 "경선룰은 양비론의 대상이 아니다"며 강 대표를 압박하자 대표실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글부글 끓는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마치 박 전 대표가 강 대표를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강 대표의 한 측근은 "박 전 대표는 자신이 정한 것 외에 다른 원칙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강 대표와 가까운 한 당직자는 "박 전 대표의 발언은 강 대표에게 '중재안을 내지 말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전직 대표로서 현 대표의 역할을 너무 무시했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어떻게든 판이 안 깨지게 양측을 잘 보듬어야 하기 때문에 중재안을 발표하기 전에 양 캠프와 물밑접촉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빅2'의 입장을 도저히 좁히지 못할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 강 대표가 여론조사 문제에선 워낙 강경한 태도인 박 전 대표의 입장을 살려주고 대신 다른 사안에서 이 전 시장의 요구를 수용하는 '패키지 딜'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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