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너무 신파적인, 너무 절망적인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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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요즘 문단에서 '요즘의 젊은 소설'이란 표현은 단순한 명사구가 아니다. 일종의 개념에 가깝다. 이 용어는 일단 '요즘의 젊은 작가들이 쓰는 소설'이란 뜻을 지닌다. 당연하다. 다만 '젊은 작가'란 부분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요즘 문단이 인정하는 '젊은 작가'는 ▶30~40세 사이▶2000년 전후 등단이란 기준을 대체로 따른다.

하나 '요즘의 젊은 소설'은 작가의 연륜을 따지는 차원을 넘어선다. 훨씬 논쟁적이며 문학적인 개념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쓰는 소설이, 과거의 젊은 소설과도 다르고 요즘의 '젊지 않은' 소설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의 젊은 소설'은 20세기와 결별하는 21세기 소설 양식의 징후를 몸소 가리킨다. 요즘 '요즘의 젊은 소설'이란 말이 부쩍 눈에 띄는 이유다.

앞서 굳이 징후라고 적은 까닭이 있다. 요즘 젊은 소설에서 생경한 요소가 발견되긴 하는데, 현재 문단은 이를 깔끔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징후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이제껏 목격된 주요 징후는 크게 두 가지다. 외계인을 위시한 해괴망측한 등장인물이 황당무계한 사건을 도모하는 소위 박민규 식의 전략과, 밥벌이가 시원찮은 못난 청춘들의 지지리 궁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청년 백수의 서사다.

그런가 싶었는데, 전혀 예기치못한 '요즘의 젊은 작가' 한 명을 알게 됐다. 첫 창작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실천문학)를 낸 김서령(33.사진)이다. 세상에,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다!

등단작 '역전다방'은 아예 신파의 한 극단을 제시한다. 소설은 강원도 춘천 한 역전다방의 세 여자, 조 양과 장 양, 그리고 마담 언니의 이야기다. 소재만 봐도 신파가 의심되는데, 개개의 사연에서 드러나는 통속성은 70년대 호스티스 문학을 능히 뛰어넘는다.

장 양은, 말하자면 '과거가 있는 여자'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남자와 눈이 맞아 애까지 낳았다가 시댁의 반대에 부딪혀 다시 다방으로 돌아온 여자다. 호스티스 문학의 필요조건인 눈물의 순애보도 있다. 마담 언니의 애인은 시인, 그것도 겨우 등단은 마쳤지만 작품은 못 내놓는 무명시인이다. 여느 눈물 짜는 드라마의 공식 그대로, 시인은 종래 암에 걸리고 언니는 제 살림을 줄이며 병 수발을 든다.

예쁘고 능력 있는 아내와 무능한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고양이와 나'도 상투적이긴 마찬가지다. 아내의 비밀을 알아내고도 침묵을 지키는 남편이란 막판 반전은, 도식적인 인물 설정이 예정한 뻔한 결말이었다. 표제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상회 경리로 일하는 언니와 상회 주인의 의대생 아들과의 알콩달콩 사랑 타령은 애초부터 위태위태했다. 왜냐고? 신분을 초월한 사랑 따위는 문학에서도 구현되지 않은 지 오래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김서령은 자신의 소설이 빤하디 빤한 신파란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는 알면서도, 아니 알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외계 생물체를 동원하지 않아도, 김 빠진 젊은 날을 읊어대지 않아도 오늘.우리의 삶은 먹먹하단 걸 이 젊은 작가는 꿰뚫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중을 눈치채고 보니 대뜸 소름이 오른다. 소설이 그리는 오늘.우리네의 풍경에 내일은 없다. 도무지 빠져나갈 길 없는, 상투적인 오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전혀 다른 감각의 '요즘의 젊은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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