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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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정원의 긴 식사가 끝나고 엄마와 나, 둥빈과 제제는 정원의 평상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하늘에는 별이 휘황했다. 별들은 깨끗이 닦아놓은 전구처럼 반짝반짝했다. 이불을 서로 끌어당기며 싸늘한 늦여름의 산골을 느끼고 있노라니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저게 은하수야? 북두칠성이야?" 물으며 재잘거리던 둥빈과 제제가 잠이 들었는지 가는 코들을 골았다. 엄마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이야…. 처음부터 못생겼으면 다야? 하고 물을 걸…. 왜 그 여자한테 변명을 하고 시간이 왜 없는지 설명을 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끌었을까?"

하긴 이제 와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꼬박꼬박 대꾸를 하고 있는 것이 당시에도 약간 의아했던 생각이 났다.

"아무튼 이것도 병이라니까…. 에이, 그 여자 다시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당신 왜 시간이 없어? 하면 바로 야! 반말하지 마. 못생겼으면 다야! 할 텐데."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아? 엄마."

내가 묻자 엄마는, "하긴 왜 시간 없어? 하는 사람한테 야, 못생겼으면 다야 하면 좀 그렇다" 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에이, 왜 맨날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를 하는 걸까…. 얼마 전에 말이야. 한국하고 중국 작가들이 모여서 서울에서 작가 회의를 했어. 주제는 '상처와 치유'라는 것이었어. 그런데 거기 갔더니 엄마 명찰이 없는 거야. 주최 측의 실수로 안내 책자에도 엄마 이름이 빠졌고….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뭐라 했더니 엄마 명찰을 급조해 줬는데 앉을 좌석이 없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중국 작가들 틈에 앉아 있었지. 잠시 후 중국 작가 한 사람이 당신은 누구세요? 하고 영어로 묻는 거야. 내가 아무개이고 소설을 씁니다, 하니까 그 사람이 얼른 안내 책자에서 내 이름을 찾고 있더니 영 못 찾겠는지, 나랑 비슷한 여자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여자가 당신인가요?' 하잖아. 그때 엄마의 머릿속으로 짧은 영어 세 마디가 떠올랐어. It's not me, I'm not here, It's not my fault…. 그래서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정말 이상하더라. 나는 난데 내가 아니고, 나는 여기 있는데 내가 여기 없다니, 그럼 여기 없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이며, 더구나 우스운 건, 내가 왜 거기서 그 사람이 궁금해 하지도 않는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을까. 이게 바로 내가 입은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남들은 '상처와 치유'에 대해 열심히 떠드는데 엄마 혼자 한구석에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거기 없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 거야…. 나중에 혼자 생각했지. 그래 상처와 치유가 별개냐? 내가 내가 아닐 때, 그것은 상처이고 내가 다시 나를 찾을 때, 누구에게도 먼저 내 잘못이 아니라구요, 변명하지 않을 때 그게 바로 치유가 아니겠느냐고…."

엄마는 킥킥 웃었다. "엄마 It'not I 아냐?" 내가 묻자 엄마는 얼른 다시 말했다.

"엄마가 영문과는 나왔지만 영어를 못하는 건, 엄마는 오로지!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라구."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엄마는 아직 치유가 덜 된 게 분명했다. 엄마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영어는 열심히 하고 있지?" 하고 물었다. 엄마는 치유가 아직도 한참 덜 된 게 틀림없다.

"엄마, 아빠는 행복한 적이 없대."

내가 말을 꺼냈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코를 고는 동생들과 엄마 사이에 누워서 말간 별무더기를 보고 있노라니까 마치 코 고는 소리가 별들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나나 무스쿠리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도 한때 그렇게 헤매던 때가 있었다고. 한때, 였으니까 이제 엄마는 헤매지 않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아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좋은 일이 있을 때, 날 보러 오기 전에 기쁠 때, 얼른 의자를 내어줘. 그럼 그게 행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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