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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때를 기억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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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만지면 안 돼! 어린아이가 하루에도 수백 번 듣는 명령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어린아이의 손은 언제나 차단당한다. 어린아이는 만지며 세상을 알아 간다. 강아지처럼 킁킁 냄새 맡고 입으로 가져가 쪽쪽 빨며 세상을 파악한다. 오, 그런데 만지지 말라니. 어린아이는 손으로 만지고 맛보는 세상을 떠나 시선으로 세상을 만지며 어른이 되어 간다. 책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며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어린아이 때를 어떻게 지나왔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엄마였다. 배 아플 때 엄마 손은 약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넓게 보이던 학교 운동장, 길게만 느껴지던 집 앞 골목길. 멀리 어딘가로 이어져 있는 신작로와 언덕배기 산. 유년시절은 힘들 때 가끔 돌아가 쉬고 싶은 어떤 곳이다. 때로 잊히지 않는 유년의 상처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우물처럼 항상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평생을 지배한다. 유년은 존재의 우물이다.

사실 어린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근대 많은 어린아이가 병으로 일찍 죽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도 가족공동체 안에서 단순히 '미숙한 노동력'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집안이 힘들 때 어린아이를 버리거나 팔기도 했다. 어린아이는 취약해 저항할 수 없는, 마음대로 다룰 만한 존재들이었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이나 '백설공주'가 그 예다. 효녀 심청 이야기도 엄밀히 따져 보면 딸 팔아먹는 이야기다. 동화는 지배담론인 '효'사상을 훈육하기 위해 얼마든지 미화된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린 소년들은 소매치기 집단에 잡혀 들어가기도 한다. 전근대 당시 어린 소녀.소년들은 곡식이나 전답을 받고 손쉽게 팔려 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교육의 대상으로 인격화된 것은 근대에 와서부터다. 근대 공교육이 정립되면서 어린아이는 계몽의 대상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 되었다. 학교에 가기 싫고 놀고 싶은 어린아이는 벌을 받는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며 부모 몰래 나쁜 친구와 어울려서도 안 된다. '피노키오'는 근대 학교제도에 길들여져야 하는 어린아이의 전형을 드러낸다. 학교를 잘 다니고 부모 말씀을 잘 듣는 아이만이 나무인형에서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판타지물에서 어린 소녀.소년들은 더 이상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해리포터'에서 해리와 그 친구들, '반지의 제왕'에서 어린 호빗족들은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을 구원하는 어린 영웅들로 등장한다. '원령공주'에서 원령공주 산은 들개 가죽을 쓰고 다니며 인간들이 철기구로 황폐화시킨 숲을 구해 낸다. 어린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세상을 정복하려 하지도 않고 세상이 만들어 낸 집단의 합리적 질서를 따르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창조적 상상력으로 해리포터의 마법을 부리기도 하고 호빗족처럼 먹고 마시는 것을 낙천적으로 즐기기도 한다.

해서 어른들은 어린이날이 되면 어린이에게 더욱 특별하고자 한다. 어린이에게 마음껏 사랑을 주고자 애쓴다. 그러나 어쩌면 어린이날은 자신의 어린 자녀를 살피는 날이 아니라 어린 아들 딸 안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는 날인지 모른다. 때 묻지 않은 그때 꿈을 발견하는 날인지 모른다. 노루 눈같이 맑고 큰 아이의 눈망울을 쳐다보면서 눈 안에 비치는 자신의 순수함을 되찾고자 하는지도. 최근 가족 영화 '우아한 세계' '아들' '날아라 허동구'에서 아이와 아버지의 우정이 그려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크고 싶어 조바심을 치면서 크고 나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이 '울엄마'로 보이던 시절. 어른보다 몇 배 빠른 맥박으로 생명의 고동을 느끼는 시절. 손으로 맛보고 입으로 세상을 만지던 시절. 그리하여 시간은 지나가리니 어린아이 때를 기억하라. 그때 간직했던 꿈을 기억하라.

김용희 평택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