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 여사 잃은 박 대통령 자주 눈물 보여|재혼 권하면 "자식 결혼시킨 뒤 하겠다"|25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74년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면서부터 「청와대 야당」의 극진했던 내조도 끊겼다. 당시 청와대의 영부인 부속실에는 김두영씨와 정재훈·나은실 여사 등 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정재훈 여사(현 서울개포고 교장)는 『육 여사께서 생전에 우리 3명에게 「중용지덕」이라는 친필휘호를 하나씩 주신 적이 있다.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어떻든 영부인의 서거로 박 대통령 마음속의 「중용」은 차츰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다.
나은실 전 비서관의 회고.
『여사님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대통령께서 우리 세 명과 큰 영애(근혜씨)를 부르시더군요. 「그간 내자가 해오던 역할을 앞으로는 근혜가 대신 할겁니다. 변함없이 잘 도와주세요」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여사님이 돌아가신 마당에 모든게 전 같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1년 가량 더 근무하다 각각 자기 분야로 흩어졌지요.』

<혼자 있는 시간 늘어>
박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는『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아버님이 내게 부쩍 엄해지셨다』고 회고했다. 홀로 남은 가장으로서의 부담과 책임감 때문이리라.
지만씨는 또 『어릴 때부터 습관든 대로 어머님이 세상을 뜨신 후에도 잠자기 전에는 꼭 아버님 침실에 가서 인사했다. 어떤 날은 침실의 줄무늬 소파에 아버님이 혼가 앉아 뭔가 생각에 잠겨 계셨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는 곁에 가기도 어색해 그냥 「아버님 안녕히 주무십시오」라고 인사만 드리고 나오곤 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주변에서 걱정을 안했을리 없다, 심지어 정치적으로는 반대입장이던 야당지도자들도 나라 전체를 위하는 차원에서 박 대통령에게 이른바「속현」을 권유했다(재혼 또는 재취를 점잖은 표현으로 속현이라 한다. 금슬의 끊어진 현을 다시 잇는다는 비유로, 아내의 죽음을 뜻하는「단현」과는 반대말.)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77)의 증언.
『76년3월 내가 국회부의장에 피선된 뒤 정일권 국회의장·구태회 부의장과 함께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어요. 그 자리에서 「웬만하면 속현하시지요」라고 대통령에게 권했습니다. 비록 나는 야당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진지하게 말한 것이었지요. 사람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정상적인 가정이 있어야 바깥일을 원만히 꾸려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대통령은 농담 비슷이 받아들이더군요. 「아이구, 이 부의장이 좋은 사람 소개하면 가지요」라면서 말입니다.』이 전 총재는 그 뒤 10·26후 일본 동경에서 정일권씨를 만나 『그때 권유한 대로 박대통령이 재혼했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라고 한탄하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특정인 천거 안해>
이동원 전 장관도 재혼을 권했다. 그의 기억.
『영부인이 돌아가신 얼마 후 박 대통령이 초청해 점심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우리 집사람이 병으로 입원 중이었는데, 대통령께서「부인이 병상에 누워 있다는데 곁에서 잘 좀 도와줘. 나도 집사람이 간 뒤로는 생전에 못해준 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라고 말하셨어요. 내 마누라는 아직 살아 있는데 상처한 분이 그 걱정을 해주니 마음이 안됐더군요. 그래서 「각하, 살아 계신 분은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청와대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외로운지 일반사람들은 모르지만 저는 알지 않습니까. 옛말에도 열 효자보다 악처 하나가 낫다지 않습니까」라고 은근히 운을 뗐지요. 그러자 박대통령은 픽 웃으며 「이 장관, 날 위해 보아둔 사람이라도 있어?」라셔요.「그건 아닙니다. 그냥 제 마음이 안돼서…」라고 대답하니까 각하는 「모두들 그러데」라고 말했습니다. 측근들이 걱정들은 많이 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를 천거했다든가, 박 대통령이 특정인을 마음에 두었다는가 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육 여사 서거 후 진지하게 재취를 권유한 「재혼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최고권력자의 인간적인 외로움을 임시방편으로 달래고 비위를 맞춰 보려는 「채홍파」도 많았던 모양이다. 이 같은 행태는 결국 박대통령의 공적인 업적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10·26사건의 한 요소로까지 번지게 됐다.

<요정에 모시기도>
대통령비서실에 근무했던 P씨의 증언.
『사실 그런 점이 있지요. 근엄한 인품으로 정평이 나 있던 중앙정보부장 A씨의 경우 채홍같은 걸 무척 꺼렸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외로운 각하를 위해 적당한 술집이라도 하나 개발해 두는게 괜찮다」고 자꾸 권유했어요. 그래서 정보부 주선으로 쓸만한 마담 한 명을 교섭해 당시만 해도 한갓지던 강남지역에 요정을 차리게 했지요. 호스티스들도 물색해 놓고요. 적당한 기회를 보아 A씨가 대통령을 그곳으로 모셨지요.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 그랬는지 하필 고르고 골라 각하 옆자리에 앉힌 아가씨가 그날 따라 아양이 지나쳐 오도방정을 떨고 말았어요. 각하는 예의에 어긋나는 그런 타입의 여자를 싫어하셨거든요. 술좌석이 무르익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셨습니다. 대통령 각하가 다시 그 술집을 찾지 않은건 물론이고, 마담은 울상을 짓고… 그래서 정보부 국장급들이 그 술집을 단골로 삼았지요.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당시 정보부의 간부들이 술값을 제대로 주었겠습니까. 결국 1년도 안돼 요정은 문을 닫았어요.』
「대통령 재혼작전」은 구두선으로 끝났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증언했다.
『정일권·김종필 전 총리도 내가 배석한 자리에서 대통령께 권유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각하께서는 「근혜·근영·지만이를 시집·장가 보낸 뒤에 재혼하겠다. 그리 알아라」고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개인적으로도 각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에는 그런 건의를 올린 적이 없습니다.』 <노재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