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야, 너도 지루하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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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5면

이 지구상에 라마 같은 동물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위스에 와서 처음 알았다. 자전거를 타고 사방 천지를 나돌아다니는 것이 내 일상의 가장 큰 즐거움인데, 그 길 위에서 라마를 발견한 것이다. 라마라는 동물은 내게 1957년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 나타났다가 도시의 무언가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택시를 타고 제 고향 안데스의 고산지대로 귀향한 후 도시에 나타나지 않는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생명체 같은 것이었다. 인지 모라스는 ‘매그넘’ 사진작가 중 가장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사진을 찍었던 여성 작가인데 그녀의 사진을 통해 라마라는 동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은 나처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터이다.

미스 허니의 노마딕 라이프

몇 해 전에는 레바논에 침투하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무서운 장비를 나르는 일에 침투되었던 라마들이 평화를 사랑한 나머지 국경 넘기를 거부했다는 소식을 어느 팔레스타인 작가의 글을 통해서 읽었던 터라 라마에 대한 신비감은 더욱 증폭되어 있었다. 달라이 라마와 라마라는 동물이 연관이 있는지는 결코 알아내지 못했지만 내 친구 마리안의 말에 따르면 몇몇 스위스 농부들이 티베트에서 라마들을 데려와서 농장에서 키우고 있다고 했다.

스위스에서 라마보다 더 신기했던 건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아이들이 내게 “그루에찌(Gruezi)”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당황하여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뒤늦게 그들이 지나간 뒤통수에 대고 작은 소리로 “그루에찌”라고 웅얼거릴 때의 민망함이란….

한국의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결코 인사를 하지 않는다. 한 번은 내 집 앞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안녕” 하고 인사말을 건넨 적이 있는데, 그들의 썰렁한 반응이란 이런 것이었다. “너 저 여자 알아?” “아니.” “피-.” 동네 아이들에게 나는, 그저 해롭지 않을 만큼 정신이 나가 있거나 실없는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실 스위스에 오기 전까지 나는 스위스를 세계의 부자들이 선택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어딘지 좀 따분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따분하면 고산지대 구석구석 자전거 길을 만들고, 코너마다 예쁜 표지판을 세우고, 얼마나 따분하면 기초과학 같은 재미도 없고 별로 돈도 되지 않을 것 같은 학문에 투자하고, 얼마나 따분하면 집주인들이 세입자들에게 보조금을 주며 정원 꾸미기를 장려할까?

초등학교 교사인 마리안을 따라 학교에 갔더니 세상에,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그 조막만 한 손으로 톱으로 나무 자르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톱으로 나무를 잘라 하트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내 이름의 ‘kim’을 새겨 선물했다. 도대체 얼마나 따분하면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톱질을 배우고, 얼마나 심심하면 아이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저토록 쉽게 상냥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랬다.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시간 안에 근대화를 이룩한 나라, 한국에서 자란 나는 그 따분한 것들이 이토록 달콤한 것인지를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거다.

그런데 그들도 모른다.

자전거를 타다가 지친 어느 날 저녁 무렵 ‘Ever Green’이라는 바에 목을 축이러 들어갔더니, 말끝마다 ‘Fxxx’이라는 단어를 달고 사는 듯한 어떤 청년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 비밀을 얘기해줄까? 나는 이 X같은 술이 없으면 X같이 지루한 나라에서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거야.” 순간 나는 딜런 토머스의 말을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 아마도 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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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허니’ 김경씨는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로 개성 넘치는 책 『뷰티풀 몬스터』『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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