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연방대법원 ‘징벌적 손해배상제’ 제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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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12면

미국에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 이라는 제도가 있다. 불법 행위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을 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 그 ‘징벌’로 실제로 피해자가 입은 재산상 손해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배상하게 하는 제도다.

1993년 맥도널드에서 자기 실수로 커피를 엎질러 손에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270만 달러의 배심원 평결을 받아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징벌적 손해배상이 적용된 사례다. 맥도널드가 화상 위험을 알면서도 충분히 경고하지 않고, 엎질러짐 방지 장치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보다 훨씬 적은 금액에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이 사건은 징벌적 손해배상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정당성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개별 사건에서 발생하는 실제 손해액을 배상하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가해자 측의 재발 방지 노력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이에 맞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야말로 마구잡이 소송을 부추겨 미국을 소송 천국으로 만든 주범이라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90년대 들어 이러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연방대법원은 징벌적 손해배상이 과도하고 자의적인 경우에는 헌법에 위반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와 관련해 연방대법원은 지난 2월 20일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골초로 살다가 폐암으로 사망한 남자의 부인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다. 부인은 담배회사가 광고ㆍ연구결과 등을 통해 담배가 실제보다 덜 위험한 것처럼 속였다고 주장했다. 오리건주 1심 법원의 배심원들은 실제 손해배상으로 약 82만 달러,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약 8000만 달러의 배상을 명했다. 오리건주의 2심, 3심 법원도 배심원들의 결정에 동조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사건을 오리건주로 돌려보냈다. 사건의 당사자(사망자, 미망인)가 아닌 사람들이 담배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까지 담배회사를 징벌하고자 한 것은 위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확장해 적용한다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피고의 사유재산을 강제수용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한국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치열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고, 영ㆍ미와 옛 영연방 국가 이외의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선진국의 제도이고,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피상적인 이유로 덜컥 받아들일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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