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는 자아 보여주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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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27면

서울대학교에서 ‘말하기’ 강좌를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강좌명을 바꾸는 게 낫지 않으냐”고 말한다. 그 말 속에서 사회적 편견을 느끼게 된다. 말하기를 좁은 의미로 이해하고, 그에 대해 비중을 두지 않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KBS 아나운서

말하기는 ‘말은 잘하기’ 혹은 ‘말만 잘하기’가 아니다. 제대로 된 말하기란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듣기부터 시작해, 이해하고 판단해 말하고, 또 듣는 커뮤니케이션의 전 과정을 포함한다. 즉 말하기엔 사고와 성찰의 단계가 수반되어야 한다.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말에 대해 성찰해 보고자 한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보다 조금 오래 살았다거나 말하기가 직업이라고 해서 그들을 내 말하기의 틀에 가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잘 하는 말하기에 어떤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삶의 궤적만큼이나 서로 다른 말하기를 구사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안에 들어있는 표현의 욕구와 가능성을 말이라는 매체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지를 쳐주는 것이다. 때론 진심도 가지를 쳐야 한다. 말하기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내 밖의 무엇을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내 안의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꺼내려면 우선 자신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은 흔히 내 밖의 타인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듣고 말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소통한다.

듣기의 전 과정을 쪼개 들여다보면 금방 감지할 수 있다. 청각적 자극을 구별해 듣고 나면(receiving), 그 자극에 의미를 할당하고(understanding), 저장된 기억으로부터 무언가를 불러내(remembering), 화자(話者)가 언어화한 메시지를 해석하고(interpreting), 그것을 판단해(evaluating), 반응한다(responding). 늘 우리가 겪는 과정이지만 순간순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소통의 중심에 있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자기개념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의 경우 소통도 건강하다. 다른 사람과의 말하기가 편치 않을 경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한번 자유롭게 써보자. 자기개념을 보다 수용적으로, 평가를 배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소통의 기본 자세다. 진정한 자기수용이 안 될 경우 맺는 관계들은 허울과 벽을 쌓는 일이 될 뿐이다. 자신을 솔직히 내보이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요즘 ‘은둔형 외톨이’로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처지로 살았거나,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관계를 단절하게 되는 경우들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관계맺기란 누구에게나 참 눈물겹도록 힘든 일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100% 긍정적이고 건강한 자기개념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힘들지만 소통에서 오는 즐거움을 맛볼 권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 즐거움을 맛보게 해줄 의무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거나 창조하기 위해, 변화와 영향을 주기 위해 소통한다. 무엇보다도 소통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자아를 인정하고 인정받는다. 나는 알고 남들은 모르는 ‘숨겨진 자아’로부터, 나는 모르고 남들은 아는 ‘눈먼 자아’로부터, 나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자아’로 나아가는 길이 소통의 길이다. 숨겨놓은 나만의 자아를 타인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친구는 모르는 그 친구의 눈먼 자아를 따뜻하게 이야기해줌으로써 자신의 자아가 시원하게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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