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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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03면

일러스트 이강훈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온몸의 시인’ 김수영(1921~68)의 시 ‘어느 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는 자유를 희구하고 자유를 가로막는 여건들에 대해 절규한 시인이었지요. 문학청년들은 ‘난닝구’를 입은 채 눈빛만 살아있는 그의 삐쩍 마른 얼굴 사진을 보면서 문학에의 순교를 꿈꾸곤 했었더랍니다. 질풍노도의 시절엔 누구나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였으니까요.

옹졸한 반항

그는 생계를 위해 덤핑출판사 번역 일을 하고 닭을 키웠습니다. 일상은 쩨쩨하고 옹졸하며 시시했습니다. 소시민의 한 전형이었습니다. 급기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집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게 지독한 역설임을 잘 압니다. 그는 가난보다 정신의 부자유와 싸웠으니까요. 양심에 걸리는 일들을 이 잡듯이 뒤져 마음의 불편함을 덜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시인은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 정정당당하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지 못한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 즈음 야경꾼이 방범비 20원을 받으러 서너 번씩 찾아왔었고요. 시인은 뭔가 트집을 잡아 1원이라도 깎으려는 절실한 흥정을 시도한 눈치입니다. 이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야경꾼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는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구청직원도 동회직원도 아닌, 1원을 깎아주지 않는 힘없는 야경꾼에게 분노하는 나야말로 모래나 먼지처럼 작은 인간이 아닐까. 이 순간, 다음부터는 위풍당당하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겠다고 속으로 속삭이는 시인의 태도가 오버랩됩니다. 우리 다 함께 고백하고 다 함께 떳떳해지자는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하는 장면입니다.

시인들의 생활과 시 쓰기라는 게 대체로 그러할 듯합니다. 순금의 언어까지는 아닐지라도 한 십 년 살아남을 수 있는 밀도 있는 언어를 한 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웁니다. 반면 돈벌이에는 억척스럽지 못합니다. 시 한 줄과 월급을 맞바꾸는 형국입니다.
시인에게 가난은 관례와도 같습니다. 별을 헤다가 발을 헛디디기 일쑤입니다. ‘시 쓰고 있네’라는 한때 유행어가 이를 잘 비꼬고 있지 않습니까. 서정주 시인은 가난이야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읊었습니다. 정희성 시인은 아내마저 시인의 무능한 경제를 비웃는다고 절규했습니다. 색깔은 서로 달라도 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정희성의 ‘아버님 말씀’ 중)는 것입니다.

찬란한 자존심

쓸 때도 돈이 안 들지만 아무리 써도 돈이 안 되는 행위에 목숨을 반쯤 걸었다면, 거기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한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깔려 있다고 믿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는 시절에 순수한 기쁨의 영역이 남아있다는 게 다행스럽기까지 합니다.

시에 대해 모두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젊은 스타 시인의 시집도 고작 몇 천 부 팔립니다. 그런데 최근 시인의 구질구질한 가난에 대해서는 부쩍 말이 많아졌습니다.

기초예술연대, 기획예산처, 김달진미술연구소,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일언이폐지왈, 예술가들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벌이로 최저 이하의 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국가 차원에서 예술인 생계를 지원하는 새로운 정책이나 제도를 마련하자는 담론을 펌프질하려는 의도라고 짐작됩니다. 이런 기회에 예술인들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설문조사 통계들은 주객을 뒤바꾸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들이 뭐에 눈이 멀었고, 무엇을 고민하며, 왜 작품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깊은 인터뷰가 전제돼야 마땅합니다. 예술인의 사회적 기여 부분이 공론화돼야 국민의 세금에 손 벌리는 행위가 떳떳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술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거세한 채 그들의 궁핍을 부각하는 일은 부당해 보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드러내놓고 예술가에 대한 존경을 거둔 채 그들을 사회안전망의 아토피쯤으로 여긴다는 징후로 읽힌다면 과잉 해석일까요.

가난한 예술가들이 영혼의 귀족으로서 아득바득 살아가는 이 세상을 연민과 측은지심의 눈길로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신의 위기

예술인을 돕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회적으로 예술인의 가난이 아니라 예술에 대해 말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술과 출판과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예술정신과 출판정신과 인문정신의 위기입니다. 자유와 다양성의 위기입니다.
스스로 독립공화국임을 선언하는 청년들이 지금도 ‘고통의 축제’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듭니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각 분야에서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원’하시렵니까. 예술에 대해 ‘따뜻한 빈말’ 한마디 거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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