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세계 모든 기업이 사모펀드의 ‘사냥감’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호 20면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 18세기 초 식민지 시대의 미국 건축양식을 보여주듯 붉은 벽돌 건물이 벌거벗은 담쟁이 넝쿨을 입은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경영대학 건물에서 만난 제프리 E 가튼(60ㆍ사진) 교수도 변한 모습이었다. 예일대 홈페이지와 저서에 있는 얼굴 사진과는 달리 그의 두 귀 바로 위 머리는 이미 백발이었다. 가튼 교수는 ‘경영환경 변화’ 연구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쓴 책 중 『부의 혁명』『글로벌 경쟁력』『CEO 마인드』『경제전쟁』 등 4권은 한국에도 이미 소개됐다. 그가 『부의 혁명』에서 소개한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은 한동안 국내에서도 유행어가 됐었다. 전략적 변곡점을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대뜸 “큰 변화가 있는 때를 의미한다”고 했다.

‘경영환경 변화’연구 석학 제프리 가튼 예일대 교수 # ‘샌드위치 코리아 ’ 탈피하려면 인종·국적 뛰어넘어 인재 불러모아야

“기존 세계의 종말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시점을 말한다. 이런 때 기업인도 경영전략의 기본 틀을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가튼 교수는 “이런 개념을 처음 소개한 사람이 인텔의 앤드루 그로브 전 회장”이라고 했다.

그로브 전 회장은 1996년 『강박관념이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에서 전략적 변곡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비즈니스 리더가 생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시점을 전략적 변곡점이라고 한 것이다. 가튼 교수는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싼값에 메모리 시장을 잠식해오자 그로브는 생존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비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기로 기본전략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전략적 변곡점은 많다. 가튼 교수는 1930년대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중국의 개방과 개혁,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을 꼽았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비즈니스 환경은 질적으로 크게 바뀌었다. 특히 요란한(Roaring) 시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기업들은 자유방임 분위기 덕분에 경영의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당시 비즈니스 리더들은 변화한 환경과 직면해 오직 살아남아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가튼 교수는 강조했다.

최근에 일어난 전략적 변곡점을 소개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서슴없이 ‘9ㆍ11테러’와 ‘엔론 사태’를 꼽았다.

“90년대에는 작은 정부가 선(善)이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정부가 할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규제 완화 또는 폐지가 시대정신이었다. 실제로 많은 규제가 완화되거나 철폐돼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최고경영자(CEO)들은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GE의 잭 웰치는 스타였다.

나라별로 시대의 상징인 CEO가 속출했다. 하지만 9ㆍ11테러 이후 시민들은 안전에 민감해졌다. 기업이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또 엔론 사태 등으로 기업과 기업인의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 시민들이 투명성을 더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중요성을 느꼈다. 또 정부를 통해 비즈니스 리더들의 행동을 규제하려고 했다. 비즈니스 리더들은 규제를 원하지 않지만, 정치적ㆍ경제적 환경이 변해 규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규제강화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경제 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우려하는 쪽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리더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가튼 교수는 강조했다. 이같이 바뀐 환경에서 비즈니스 리더들은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향후 비즈니스 리더들이 겪을 도전이 만만찮다는 얘기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의 압력과 간섭이 커질 전망이다. 월마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월마트가 직원들의 복지후생 등을 소홀히 했다는 의혹 때문에 시민들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비즈니스 리더들은 경영상 실수를 범하면 과거보다 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밖에 사모펀드의 기업사냥 공세도 비즈니스 리더들을 적잖이 압박한다. 사모펀드의 기업사냥인 차입매수(LBO) 공세 앞에 전 세계의 모든 기업이 완전히 노출돼 있다.”

그가 말한 차입매수란 ‘매수할 기업의 자산 등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적은 자본으로도 큰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 요즘 비즈니스 리더가 직면한 도전은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고 그는 역설했다.

“오래된 문제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이 증권시장의 압력이다. 요즘은 한 기업의 주식을 10년 이상 보유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 이들은 분기 실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CEO는 장기 전략보다 주주의 입맛에 맞춰 단기 실적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기업의 장기 성장잠재력이 줄 수밖에 없다.”

가튼 교수는 현재 일본의 도요타 고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경제에도 관심이 크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인 한국 경제와 기업 문제의 해법을 물었다.

“한국 정부나 기업 모두 전략적 변곡점에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클 것으로 본다. 삼성과 LG, 현대 등은 이미 세계적 기업이다. (외환위기 이후) 짧은 기간에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특히 공격적인 전략이 눈길을 끈다. 세계 정상급 기업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향후 10년간에도 한국 기업은 낙관적이다. (삼성과 LG, 현대 등을) 이어갈 차세대 기업들도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이 교육시스템을 개혁하고 연구개발 환경을 업그레이드해야 더 발전할 수 있다. 한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외국 학생은 극소수다. 한국의 대학을 글로벌화해 해외의 똑똑한 학생을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학생과 외국 학생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협력해야 한다. 일본의 대학은 세계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처럼 경제발전이 멈춰섰던 것이다. 한국은 일본 대학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대학이 세계화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연구개발 환경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 싱가포르를 보면 정상급 바이오 연구센터를 많이 설립했다.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과학자를 영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와 기업은 인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업그레이드할지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일본보다 폐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중국보다 좀 더 전략적이라면 한국 경제와 기업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 또 한국 기업은 다국적 경영진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인종과 국적의 구분을 뛰어넘어 유능한 인재를 경영진으로 영입해야 한다. 글로벌화하지 못한 일본 기업이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예외는 있지만 일본 기업들은 고위 경영진이 모두 자국 사람뿐이다.”

가튼 교수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상무부 무역담당 차관을 지내는 등 행정부 경험도 많다. 그래서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의 대(對)중국 정책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물었다.

“폴슨이 중국과 전략적 대화를 하는 방식은 좋은 아이디어지만 토론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는 중국의 사정을 너무 많이 알다 보니 거세게 몰아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딕 체니 부통령 등) 다른 사람들은 중국의 정책변화 속도에 만족하지 못한다. 중국도 조지 W 부시 행정부보다는 차기 정부와 협상하려는 태도다. 시간 벌기다. 따라서 중국은 토론만 할 뿐 정책을 바꾸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최선의 방법은 강한 압박이다. 내가 정부에서 일할 때 일본과 무역역조 해결을 담당한 바 있다. 그때도 많은 토론을 벌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지금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힘을 모아 중국을 압박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가튼 교수는 미래의 비즈니스 리더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언어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