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마음 주지 않는 콧대 높은 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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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17면

마스터스 취재를 위해 4월 3일부터 9일까지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에 머물렀다. 올해도 어김없이 소나무는 푸르렀고, 진달래는 흐드러졌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봄 향기에 흠뻑 취했다.

투어 에세이 ⑥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오거스타의 체취, 목련향
기억은 냄새로부터 온다. 군대 내무반에서 나던 그 냄새는 푸른 제복을 떠올리게 한다. 길을 걸을 때, 어디선가 풍겨오는 샤넬 NO.5는 옛사랑의 추억이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에도 이곳만의 향기가 있다. 소나무 향과 목련ㆍ진달래ㆍ개나리의 향기가 버무려진 독특한 냄새. 오거스타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필자를 반긴 것은 바로 그 독특한 향기였다.

골프장 입구에서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매그놀리아 레인(Magnolia Laneㆍ목련길). 목련꽃 향기가 코를 간질이는가 싶은데 어느덧 기억은 최루탄이 자욱한 시위 장면으로 흘러간다. 목련꽃 향기를 맡을 때마다 움찔하는 두려움을 느끼는 건 필자만의 버릇인가. 목련은 봄마다 항상 최루탄 냄새와 함께 화려한 자태를 뽐내곤 했다. 목련꽃 그늘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아파야 했던가. 오거스타에서 최루탄 냄새 자욱한 시위 현장을 떠올린 필자는 그렇다, 386이다.

눈부신 녹색의 정원 
오거스타는 색상이 선명한 한 폭의 그림이다. 오거스타의 하늘은 파랑 그대로의 파랑이고, 잔디는 녹색 그대로의 녹색이다. 진달래의 분홍과 개나리의 노랑이 그 위를 수놓아 아름다움은 절정을 이룬다. 흰색 목련꽃과 녹색 잔디의 콘트라스트에 눈이 부시다.

오거스타는 색깔 배치를 정교하게 고려한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하다. 흰색 벽면에 검은색 지붕을 덮은 미니 2층의 클럽하우스는 단출하다 못해 소박하다. 무채색의 클럽하우스는 그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려처럼 보였다. 코스 곳곳에 자리 잡은 그늘집은 녹색, 회원들이 입는 재킷의 색깔도 녹색이다. 마스터스 대회 때마다 파는 샌드위치의 포장지도, 식당의 테이블보도 녹색이다. 오거스타 밖에서는 녹색의 재킷과 포장지가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는데 유독 오거스타 안에서는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역사 간직한 아이젠하워 트리
오거스타는 손때 묻은 툇마루다. 1933년 문을 연 지 어언 74년, 세월의 두께는 켜켜이 쌓여 전통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클럽하우스의 문턱은 닳아서 반들반들해졌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클럽하우스는 골프장 개장 전인 1854년에 지은 건물을 개축한 것이다. 17번 홀 페어웨이의 ‘아이젠하워 트리’는 수령이 127년이나 된 등나무다. 티샷을 할 때 나무에 공이 맞는 일이 가끔 생기자 이 골프장 회원이던 아이젠하워(1953~62년 미국 대통령)가 “베어버리자”고 해서 유명해진 바로 그 나무. 만약 그때 베어버렸다면 지금의 ‘아이젠하워 트리’도 없었을 것이다. 보비 존스도, 아이젠하워도 세상을 떴지만 나무는 그대로다.

1번 홀 페어웨이 양편에는 키 자란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저 소나무 역시 70년 이상 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진 사라센과 벤 호건, 아널드 파머가 해마다 봄이면 저 나무 밑을 지나며 때로는 환호하고, 때로는 좌절했을 것이다.

황홀한 12번 파 3 홀
오거스타의 코스는 녹색 융단이다. 솔향이 짙게 풍기는 나무 밑을 걷다 보면 공원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파3의 4번 홀은 얼굴 긴 성형 미인이다. 길이가 무려 240야드나 된다. 마스터스 대회가 열릴 때마다 코스 길이를 늘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홀에선 온그린하기가 쉽지 않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그린 스피드가 무척 빠르다. 프로들도 페어웨이 우드를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콧대 높은 미인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12번 홀(파 3ㆍ155야드)의 별칭은 개나리(Golden Bell)이지만 ‘하트브레이커(Heartbreaker)’라고도 불린다. 너무나 아름다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여인이랄까. 그린 주위에 실개천이 흐르고, 앞에는 커다란 벙커가 입을 벌리고 있다. 가장 까다로운 홀 가운데 하나지만 개나리가 만발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3 홀로 변한다. 갤러리는 그린에 다가갈 수 없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널 수 있다. 갤러리는 그 아름다움을 멀리서 지켜봐야만 하기에 애틋함이 더하다.

아름다운 지옥(13번 홀·파 5)

거리는 510야드. 페어웨이 중간에서 왼쪽으로 꺾이는 도그레그 홀이다. 페어웨이 왼쪽과 그린 앞쪽으로 실개천이 흐른다. 그린 위쪽엔 부챗살 모양의 벙커 4개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페어웨이 왼쪽엔 분홍빛 진달래가 줄지어 핀다.

홀의 아름다움에 취해 미스샷을 해선 곤란하다. 일단 티샷은 페어웨이 오른쪽을 향해 보내야 한다. 장타자들은 드로 구질을 구사해 페어웨이를 공략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왼쪽의 실개천이나 꽃밭에 공을 빠뜨릴 우려가 있다. 이 홀에서 연거푸 두 번의 샷을 잘하면 큰 상이 기다린다. 티샷에 이어 두 번째 샷도 잘한다면 이글이나 버디를 잡아 한꺼번에 타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지옥’으로 불려간다.

샷거리나 정확도에 자신이 없다면 스리 온 작전이 바람직하다. 프로선수들도 무리하게 투 온을 노렸다가 그린 앞 실개천에 공을 빠뜨리곤 한다. 그린 뒤쪽에서 앞쪽으로 내리막 경사가 있기 때문에 샷이 너무 짧으면 공이 흘러내려 워터해저드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너무 길면 그린 위쪽의 벙커에 빠지고 만다. 그린 한복판을 향해 높이 띄워서 공을 세우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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