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자신감’ 이승엽의 화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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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16면

‘이승엽 화법’은 시간에 깎이고 다듬어졌다. 이제 그는 투박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표현 수위를 조절한다. 겸손을 담되 약한 소리는 하지 않는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승부욕도 드러낸다. 그의 혀는 부드럽지만 날카롭다.

이승엽은 98년 초반 홈런레이스 선두에 나섰다 타이론 우즈(당시 두산 베어스)에게 역전당했다. 시즌이 끝난 뒤 “우즈가 한국에 남았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꼭 그를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엽이 처음 내뱉었던 독한 말이다. 그는 이듬해 멋지게 승리했다.

심정수(당시 현대 유니콘스)와 홈런 대결을 벌이던 2002년(이승엽 47개, 심정수 46개)과 2003년(이승엽 56개, 심정수 53개)에는 한층 여유가 있었다. 이승엽은 인터뷰 때마다 “정수 형이 있어서 홈런경쟁이 의미 있었다”며 패자를 아름답게 포장해줬다.

이승엽은 지난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우즈(주니치 드래건스)와 또 만났다. 우즈가 “도쿄돔에서는 홈런이 많이 나온다”며 이승엽을 자극하자, 그는 지지 않고 “우즈도 좁은 요코하마에서 홈런왕에 오르지 않았는가”라고 맞받았다.

지난 4ㆍ5일 도쿄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와 주니치의 경기에서 우즈가 홈런 4방을 터뜨리자 이승엽은 “우리 4번타자(이승엽)가 상대 4번타자(우즈)에게 졌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우즈에게 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이승엽은 “이제 시즌이 시작됐을 뿐이다. 본격적인 승부는 7ㆍ8월부터”라고 말했다. 이 말도 칼날처럼 느껴질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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