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출 놓고 충돌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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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히잡(무슬림 여성이 쓰는 머릿수건)을 쓴 영부인을 원하지 않는다."

27일 시작된 터키 대통령 선출 절차를 둘러싸고 최근 앙카라.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에 나붙은 플래카드다. 친이슬람 성향의 정의개발당(AKP)이 의회와 정부에 이어 '세속주의'의 보루인 대통령 자리마저 차지하는 것에 반대하는 캠페인이다. 군부.법조계.지식인이 주축인 세속주의 세력은 대통령 단일후보로 나온 AKP 소속 압둘라 굴 외무장관 부인의 이슬람 복장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터키 공화국 건국 이래 국시인 '정.교 분리의 세속주의'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29일 세속주의를 지지하며 전국에서 몰려든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이스탄불에서 친이슬람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반면 총선에서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로 의회를 장악한 AKP와 이슬람 세력도 주요 도시에서 이슬람식 복장을 지지하는 시위를 연일 벌이고 있다.

대선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굴 후보는 27일 의회 1차 투표에서 당선에 필요한 전체 의원 3분의 2 이상의 지지에서 10표가 모자라 5월 2일 2차 투표가 실시될 예정이다. 터키의 대통령 선출은 의회가 담당하며 1, 2차 투표에서 3분의2 지지를 받은 후보가 나오지 않을 경우 과반수 찬성을 필요로 하는 3, 4차 투표를 한다.

야권은 1차 투표의 유효성 여부를 놓고 헌법재판소에 심판을 청구했다. 투표 참가 의원이 정족수인 전체 550명의 3분의 2에 못 미치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며, 새 의회가 새 대통령을 뽑도록 11월로 예정된 총선을 앞당겨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세속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해 온 군부는 28일 성명을 내고 "터키군은 세속주의의 절대적인 수호자로, 필요한 경우 입장과 행동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터키 군부는 1997년에도 헌법재판소에 압력을 행사해 터키의 첫 이슬람 정부를 와해시킨 적이 있다. 군부는 국시인 세속주의가 친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받을 때마다 항상 정치에 개입해 왔다.

그러나 정부는 "군부가 성명을 낸 것은 법조계를 움직여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현대화의 상징이던 터키의 세속주의가 이번엔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세력에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 터키 세속주의=23년 '국부(國父)'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가 터키 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국가 발전에 집중하기 위해 수립한 정.교(政敎) 분리의 국가 이념이다. 종교가 정치나 국가 운영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한다. 공공 장소에 히잡을 쓰는 것을 금하는 등 두드러진 서구화 성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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