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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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시골집의 뒷산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대문 밖으로 자동차 소리가 다가와 멈추더니, 서저마 아줌마가 왔다. 서저마 아줌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저어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나랑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후밴데, 꼭 만나서 부탁할 일이 있다고… 잠깐만 이야기하고… 조금만 있다가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해서…."

언제나 새로운 사람에 대해 낯을 가리는 엄마의 성격을 아는 아줌마는 좀 난처한 듯했다. 서저마를 따라온 여자는 엄마 또래처럼 보였는데 이미 엄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아아, 이 애가 둥빈이군요, 이 아이가 그럼 막내 제제? 하고 묻다가 나를 보더니 "어머 엄마보다 키가 크네" 했다. 여자는 얼굴에 검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왠지 나나 무스쿠리인 척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시간이 좀 경과한 후, 누군가가 "어머, 그 유명한 나나 무스쿠리 닮으셨어요" 하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 "호호 그래요? … 실은 그런 소리를 좀 들어요. 젊었을 때는 알리 맥그로 닮았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해서 좌중을 민망하게 할 타입의 여자 같았다. 낯선 사람의 출현에 약간 당황한 듯한 엄마는 서저마 아줌마가 미안해하는 것을 보자 마음을 고쳐먹은 듯이 보였다. 엄마가 호탕한 척하면서, "잘 오셨어요. 이왕 오신 거 길도 먼데 주무시고 가세요…. 우선 맥주나 한잔 하실래요?" 하는 것을 보니까 그랬다. 나는 왠지 그 여자가 불길했다. 엄마에게 맥주를 받아들자마자, "이 집 얼마 주고 지으셨어요? 앞으로 전망은요?" 하고 묻는 것만 봐도 그랬다. 엄마는 무슨 소리인지 약간 당황하더니, "집은 아는 분이 여기 근처에 사셔서 알음알음으로 지었고 앞으로의 전망은… 보시다시피 좋잖아요. 탁 트였으니까요." 했다. 여자는 애매하게 웃으며 "소설가시라 역시 돈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했다.

숯불이 피어오르는 동안 고추잠자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리 집 마당으로 날아들었고, 둥빈과 제제는 서로 그것을 잡아 제 통 속에 넣기 바빴다. 엄마는 정원에 식탁을 차리고 못생긴 나나 무스쿠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둥빈 제제, 위험해…. 거기로 가지 말고 마당 안쪽에서 잡아! 그리고 잡은 것들은 빨리빨리 놓아줘라…. 걔들도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거 아니냐…. 위녕 상추 좀 씻어 와라!" 하고 소리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당 수돗가에서 상추를 씻는데 그것도 물이라고 고추잠자리는 내 머리 위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고추잠자리…. 아마 나는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울고 싶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슬퍼지지…. 노래방에서 엄마가 자주 부르는 노래. 내게는 그 고추잠자리가 가을의 전령인 것이 분명하게 느껴져서 이제 곧 가을이 지나면 내가 치러야 할 고 3의 고통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좀 울고 싶어졌고 슬퍼졌다. 엄마는 자연 속으로 와서 상처를 치유했다는데 나는 고추잠자리를 보면서 내가 겪어야 할 상처를 되새기고 있는 게 한심했다.

엄마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겪어본 성녀의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그래, 힘들지. 엄마도 힘들었어. 그래서 공부 말고 다른 일을 해서 내가 재미있다면 해 보려고 했어. 그런데 아무것도 없더라구, 나는 오직 교실에 앉아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생각했지. 에잇, 이왕 교실에 앉아 있을 거라면 내가 이 시간의 주인이 되자. 어차피 앉아 있어야 하니까. 이 시간에 끌려 다니지는 말자…. 위녕! 네가 엄마랑 똑같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아. 정말 네가 공부 말고 더 재미있는 게 있다면 그걸 해. 나가서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친구 만나서 놀고 싶으면 그렇게 해.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어. 그건 책상에 앉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너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야 그건 확실해야 해, 응?"

마지막으로 응? 하고 물을 때 엄마는 여우 같았다. 내심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차라리 공부를 하라면서 무식하게 날 패쇼,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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