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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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물에도 맛이 있다. 외국을 여행해 보면 누구나 한국의 물맛이 상위급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유럽여행중에 가장 불편을 겪는게 물이다. 자동차나 야간열차를 타고 장거리여행을 떠나려면 으레 한두병의 에비앙 광천수를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맥주나 포도주로 갈증을 달래는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호텔에서도 수도꼭지를 틀다 보면 「이 물은 음료수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실제로 컵에 물을 받으면 십중팔구는 뿌연 석회수다. 1급 호텔이 그럴진대 정화시설이 안된 일반가정의 수도물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석회수의 대표적인 도시가 파리다. 물맛은 고사하고 비누칠을 해도 거품은 커녕 오히려 끈끈한 느낌이 들고,샤워를 하고 난 욕탕바닥에 석회질의 앙금이 엉겨있기 일쑤다.
그에 비해 우리 물은 어떤가. 맛도 맛이지만 용도에 따라 이름도 달랐다. 조선시대의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12가지 질이 다른 물을 각각 다른 독에 묻어두고 용도별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입춘날 받아둔 물은 입춘수,아들을 낳게 한다고 해 부부가 잠자리에 들기전 한잔씩 마셨다. 입동 열흘후에 내린 빗물은 약우수,대나무를 자르고 대속에 고인 물은 반천하수,모두 약달이는 물로 썼다. 이밖에도 이슬을 받아 만든 감로수가 있고 첫 새벽에 우물에서 길어낸 정화수가 있다.
그 뿐 아니라 선비들은 물을 암물(빈수)과 수물(모수)로 가려 수물만 마셨는데,샘물가운데 물색이 맑아 물밑이 보이는 가벼운 물이 수물이고 물색이 희어 밑이 어둡고 무거운 물은 암물이었다.
그런 우리의 물이 최근 유엔환경보고서에서 식수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중금속 등의 오염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근거로 그런 판정을 내렸는지는 몰라도 요즘 대도시의 많은 가정에서 수도물 대신 생수를 사먹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수질오염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좋은 정치란 「치수」만이 아닌 「정수」까지 포함해 생각할 시대가 되었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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