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라면 소름끼쳐요”(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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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 서초동 「꽃마을」의 허름한 판자집마다에는 벽의 크기에 비해 큰 창문들이 나있다.
찬바람이 창문틈사이로 들어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굳이 창문을 내는 것은 화재여부를 빨리 알기 위해서다.
새벽녘 창문쪽이 훤해지면 주민들은 우선 『불이 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으로 잠을 깬다.
6일 오전 5시쯤 주민 정지순씨(30·주부)는 잠결에 『불이야』라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창문쪽부터 확인했다.
연기와 불꽃으로 어른거리는 창문을 보는 순간 3월에 이 마을에서 두번이나 있었던 대형화재의 악몽이 떠오른 정씨는 남편과 함께 곤히 잠든 아이를 깨워 가재도구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하고 몸만 빠져나왔다. 화마는 삽시간에 정씨 집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웃 22가구를 삼켰다.
『분명히 주민들을 내쫓기 위해 「누군가」가 계획한 방화입니다.』
정씨는 그 「누군가」가 누구라는 말을 굳이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는 말투였다.
82년 「꽃마을」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18번의 화재에 시달린 주민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화라는 의심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
올해도 3월에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화재가 터지자 주민들은 당국의 대책만을 바랄 수 없다며 돈을 모아 누전차단기·화재감시대 등을 갖추는 한편 밤 12시부터 오전 4시30분까지 조를 짜 자율방범을 실시해왔다. 이번 불이 방범단이 순찰을 막 끝낸 직후 일어난 것은 방화의혹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무허가주택촌에 사는 것도 서러운데 당국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땅주인들의 눈치를 보며 우리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 같아요.』
아이들조차 불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라는 「꽃마을」주민들. 자신들이 파행적인 도시재개발정책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확실한 이주대책이나 거주대책이 세워져야만 「도깨비불」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이현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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