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셔 외교 한계”… 명예퇴직 적기판단/독일 외무 사임 왜 나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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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걸프전 오판후 정부내서도 비판/국제환경 변화 따른 능력에 의문
「독일인은 모두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지난 74년부터 18년째 외무장관을 역임,현존하는 세계 최장수 외무장관인 한스 디트리히 겐셔 독일 외무장관이 27일 돌연 사임을 발표한데 대해 독일의 한 언론인이 논평한 말이다.
월요일 아침 독일정가를 강타한 겐셔 장관의 사임발표는 전후 최악으로 평가되고 있는 독일 공공기관 노조의 파업뉴스를 완전 압도하는 폭탄선언이었다. 그가 이끄는 자민당(FDP)이 만년 제3당이지만 지난 수년간 독일 정치인 가운데 부동의 인기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겐셔,독일의 통일과 동서 냉전체제 붕괴의 주역으로 독일인들은 물론 전세계가 그의 사임을 아쉬워 하는 「천부적 외교가」겐셔,그리고 각료중 유일하게 헬무트 콜 총리와 서로 반말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인 「조화의 명수」겐셔,그는 과연 왜 사임을 결정했을까.
겐셔 자신은 『너무 오랫동안 장관으로 재임해와 이제는 평의원 신분으로 독일의 내적 통일달성등 국내문제에 전념하겠다』고 사임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독일문제 전문가들은 그의 진짜 사임이유를 두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감각있는 정치인인 그가 자신의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시점을 택해 퇴장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빌트지는 28일자 사설에서 『그가 이룩한 많은 부분,즉 유럽의 안정질서·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통일후 동서독의 균형발전 등이 사라졌다』며 『배가 흔들리자 선장이 떠났다』고 비유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장관 재임 23년에 금년 65세로 이제 심신이 지친 그가 국제환경의 변화로 인한 「겐셔 외교」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더이상 외무장관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 된다.
사실 겐셔 외교 최대의 실패작으로 꼽히는 걸프전에서의 오판 이후 그의 외교노선에 대한 비판과 사임압력은 야당은 물론 연정파트너인 기사당(CSU)으로 부터도 이미 제기됐었다.
둘째는 콜 정권의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겐셔를 유혹하고 있는 야당인 사민당(SPD)으로부터 주로 나오고 있는 이같은 「희망섞인」분석은 겐셔 자신의 정치적 색깔이나 최근의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전혀 억지만은 아닌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물론 콜 총리나 겐셔 장관 자신,그리고 현재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기민당(CDU)이나 CSU,FDP 모두 이를 강력부인 하고 있고 최근 겐셔가 연정탈퇴를 고려할만한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슈미트 정권이 점차 쇠퇴한 지난 82년 당시 사민­자민연정을 과감히 탈퇴,기민당과 손잡고 콜정권을 탄생시켰던 겐셔가 대망의 총리직을 보장하며 연정을 제시하고 있는 사민당과 재결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다만 그간 연정탈퇴의 명분을 찾지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통일후 점차 보수 우경화 하고 있는 독일의 먼 앞날을 위해서도 사민­자민 연정의 필요성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터여서 겐셔의 사임을 사민­자민 연정 구성을 위한 장기적 포석의 일환으로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특히 최근 집권 기민­사민당의 인기가 통일후 처음으로 사민당에 40%대 35%(포르자 여론조사소)로 역전된 사실은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시화 될 경우 콜 총리로서는 대통령직으로 그를 연정에 묶어두려 할 것이 예상돼 겐셔가 의외로 빨리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겐셔의 사임 이후에도 동서를 망라하는 유럽 통합추구라는 독일 외교의 기본노선은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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