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바둑최강전 예선 없이 강행 "말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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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엑스트라가 있으므로 주연이 있는 깃인가, 주연이 있으므로 엑스트라도 존재하는 것인가.
최근 한국 바둑의 총 본산인 한국기원(총재 김우중)의 1백12명 프로기사들은「밀림의 법칙」이냐,「프로의 공존」이냐의 난해한 문제를 놓고 논쟁단계를 지나 심각한 갈등·감정 대립의 양상마저 노출하고있다.
이 같은 불화는 SBS·한국기원 사무국이「SBS연승 바둑최강전」을 새로 개최하면서 예선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33명을 선발, 이 기사들로만 기전을 치르겠다고 발표하면서 내연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국내 모든 기전은 한국기원 소속 전 기사 출전을 원칙으로 해왔다. 그런데 이번 대전에서는 대국성적 우수 자나 단위상위 자인 33명만 출전시키고 나머지 79명은 제외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같은 방침이 정해지자 출전을 못하게 된 중·하위권 기사들은 자존심 문제와 다른 기전에의 도미노현상을 우려하면서「이것은 전례 없는 변칙」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기사회(회장 양상국7단)대의원회는▲TV바둑은 승부·예도의 차원을 떠난 흥밋거리의 요소가 강한 만큼 바둑보급을 위해 이벤트 적인 기획도 허용해야 한다▲스튜디오에서 치러지지 않아 전혀 방송될 수 없는 예선전에 돈을 내기 억울한 스폰서(방송국)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일본도 TV기전은 예선전이 없다는 명분을 들어 대회 개최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의 밑바닥엔「프로세계는 공평할 수 없다」는 정서가 흐르고 있고 이것이 더 큰 유였다. 실력이 약한 프로는 어차피 몇 푼 안 되는 예선 대국료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프로들은 자신이 스스로 토너먼트기사(대국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기사)인가, 보급기사(지도·강의·저술 등이 주업)인가를 판단해 장래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연간대국료 수입이 1백만 원에서 억 원대까지 천차만별인 프로바둑계, 그러나 완벽하게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스포츠의 프로세계와는 달리 유일하게 집단구조를 유지해온 바둑의 프로들은 이 같은 주장에 논리적으론 수긍하면서도 정서적으론 수긍하기 힘들다.
입단의 관문을 뚫고 프로가 된다는 것은 대회 출전의 기회를 얻는 프로생활의 출발점이지 어떤 보장도 아니다는 본질론과 한국기원은 프로의 생계를 어느 정도 보장해야 한다는 인간론이 항시 팽팽히 맞서온 것도 이 같은 바둑계 특수성에 기인한다.
지난 13일 이 문제를 위해 긴급 소집된 임시기사총회에서 다시 격론이 오갔다. 최고위전 예선전을 잠시 중단하고 모인 이날 총회에서 일부 소장파들은 전년도 수입랭킹 상위자·9단타이틀 보유자 등으로 구성된 33명이 대회를 갖는 방식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그들은『본선에 오르고 타이틀을 따는 것을 목표로 프로가 되었지 몇 푼 안 되는 예선을 목표로 프로가 된 것은 아니다』며 대회가 치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3명에 거의 영원히 낄 수 없는 프로들은 느닷없는 소외감·배반감마저 느낀 표정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바둑계를 일궈왔으나 이제는 찬밥이라는 분노가 일었다.
그것이 프로다운 것이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로 하고서….
SBS바둑대회 문제는 곧 소집될 정기총회에서 재론키로 하고 이날 토론은 끝났다. 또17일 김희중8단-이동규7단의 대결을 서전으로 대회도 열렸다. 그러나 지방기사·노장기사들이 다수 참석하는 정기총회가 열리면 이 문제는 다시 거론될 것이고 대회 진행에 진통도 따를 것으로 보인다.<박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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