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망상 넘어 정신분열증 진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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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가 피해망상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승희의 행적과 NBC방송에 보낸 동영상을 검토한 전문의들은 이구동성으로 내린 결론이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유범희 교수는 "동영상 내용이 자신을 희생양으로 일관하고 '희생당한 내 아이들과 내 형제 자매들'이라고 말해 상상 속에 여자친구와 아기가 있다고 생각(망상)하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피해망상을 넘어 좀 더 심각한 편집형(Paranoid Type) 정신분열증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동영상 내용 중 '오늘과 같은 참사를 피할 수 있는 천억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표현에서 그동안 오랫동안 누적돼온 피해망상을 볼 수 있다. 유 교수는 "그의 정신질환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워낙 내성적이고, 말이 없고, 사회성이 떨어진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돼 가족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백병원 정신과 우종민 교수도 "정신분열증으로서의 피해망상증인지, 망상형 인격장애인지 판단하긴 어렵지만 망상성 장애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는 "정신분열증이 진행하면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없지만 초기에는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우 교수는 특히 "이 질환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드러나며, 학업 스트레스나 고립감 등 환경 변화로 인해 촉발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외톨이로 만든 샤이증후군=경희의료원 정신과 반건호 교수는 조승희의 과거 행적이 외톨이였던 것이 '샤이증후군(Shy Syndrom)' 때문일 것으로 분석했다. 반 교수는 "미국에서는 샤이증후군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수줍음은 겸손하고 얌전한 미덕으로 치지만 자신을 적극 표현하고 주장해야 성공할 수 있는 미국 문화에선 심각한 사회 부적응으로 연결될 수 있다. 조승희가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스스로 '달팽이' 속으로 들어간 것이 샤이증후군 때문일 것이란 분석이다.

동영상에서 '그냥 떠날 수도 있었다. 날아서 도망갈 걸 그랬다'고 말한 것도 그의 이런 성향을 보여 준다. 조승희의 어머니가 주변에 아들의 성격이 바뀌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한 것이나, 고교 시절 그를 지도한 목사도 그가 '예, 아니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 곳곳에서 드러난 망상=조승희는 자기만의 고립된 생활에 빠져들면서 망상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반 교수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인관계에 실패하면 이를 극복(승화)하려고 하지만 망상 환자들은 이를 남의 탓으로 돌리며(투사), 반사회적으로 성장한다"고 말했다. 수줍은 성격이라면 웅변학원을 다닌다거나 연극활동을 해 상황을 바꿔 보려고 노력하지만 망상 환자는 반대로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 점점 더 고립당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은 동영상 곳곳에서 보인다. '희생당한 나와 내 아이들과 내 형제자매들', 가상의 여자친구 '줄리엣''내머리의 암덩어리' 등 표현이 그것이다.

그의 스토킹 행적도 망상에서 나온 결과다. 스토커는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쫓아다니는 것으로 망상이 빚은 결과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키워온 사랑이 현실에 부닥치면서 거절당하고, 그 결과 좌절과 분노를 키워 간다는 얘기다. 그는 분노의 대상으로 부자와 흥청망청한 사회를 지목했다. 동영상에서 격렬하게 비난한 '벤츠 자동차' '금목걸이' '보드카와 코냑' 등이 이를 보여 준다.

◆ 뇌질환으로 보는 경향도=최근 정신의학계에선 공격성과 충동성이 빚은 범죄를 뇌 손상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메모리얼 헤르만 노스웨스트 병원 신경과 파멜라 블레이크 박사는 "31명의 살인범을 대상으로 뇌영상 촬영을 실시한 결과 20명이 변연계(뇌의 앞 부분) 이상이 있었다"고 말했다. 즉 뇌 손상, 어린 시절 학대(신체적.성적), 만성적 스트레스 등으로 이 부위가 위축되면 정상적인 대인관계나 감정교환이 힘들고 충동적 행동을 보인다는 것.

일례로 최악의 학교 총기 사건이었던 1966년 텍사스대 16명 살인범(찰스 휘트먼)도 사후 부검을 통해 이 부위에 뇌종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고종관 기자,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 샤이증후군=수줍음이 지나쳐 대인관계 형성이 어렵다. 남 앞에서 목소리가 떨리고, 말을 더듬거리며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아예 사람 만나기를 피하고, 고립된 생활을 자처한다. 성인이 돼서도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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