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의 희극적 파벌싸움/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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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경제는 「비극적인 코미디」 요소를 갖고 있다. 웃고 넘어 가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무대에서 연출되는 각 장면들이 더욱 그러하다.
최근에 대구은행 내부에서 빚어진 TK(대구·경북고출신)와 비TK출신 임직원들 사이의 반목이 급기야 은행장의 퇴임을 몰고 왔다. 지난 2월 주주총회를 치른뒤 한달도 채못돼 은행의 수뇌부가 청와대·재무부·은행감독원 등 거의 모든 기관에 투서질을 하며 은행내의 TK파를 공격하거나 또는 비TK파를 몰아치는 일에 나섰다.
○코미디 같은 투서질
해마다 은행 주총을 전후해 각 기관에 접수되는 금융계 인사들에 대한 투서내용은 대부분이 어느 행장이 축첩을 했고 어느 임원이 몇천만원의 뇌물을 받았으며 또 누가 무슨 모의에 가담했다는 내용의 음해가 많아 그게 돈 만지는 금융인들의 연초 푸닥거리 쯤으로 여기게끔 세태가 험악해졌다.
그러나 이번 대구은행의 경우 관계자들이 요로에 보낸 투서는 결코 예사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쪽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선거에서 민자당을 밀지 않겠다』고 정부를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투서와 행장의 느닷없는 퇴임이 깊은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은행장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있는 재무부와 앞으로의 정치구도를 생각해야하는 정치권과의 교감이 이뤄진 상태에서 그의 퇴임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한 지방은행의 TK분파싸움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전금융계 뿐만 아니라 관계의 인사정책에 대한 지금까지의 불만이 여전히 내연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대구은행의 갈등은 TK출신 은행장이 비TK계의 전무를 쫓아낸데서 시작됐다. 비TK는 총동창회의 세를 규합해 이번 총선에서 민자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영향력을 과시,정부의 발목을 잡았으며 결국 TK계 은행장의 「목을 잘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출세를 위한 금융계인사들의 반목·질시는 지방은행이나 시중은행이나 다를게 없다. 줄 잘서야 한 자리 더 빨리 올라가고 청탁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한때는 TK계의 L씩·P씨 등이 재무부장관을 제쳐놓은채 금융계 인사를 주물러댔으며 그때 음지에 내몰린 사람들은 앙금이 풀리지 않아 또 다른 투서와 모함으로 감정을 분출시켰다. 한편으로는 꽤 유능한 TK출신들이 「물먹는」 케이스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좋은 자리에 낙점되지 못한 것은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위한 모양새 갖추기였다는 이야기도 없지않았다.
○연줄찾아 동분서주
금융자율화다,개방이다,책임경영이다 하지만 은행경영을 맡고있는 간부들은 「인사권자」인 정부관계자나 실세들에게 우선 잘 보여야 한다는게 생존법칙 제1조라고 주장한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말 몇마디 나누려고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하룻밤에 상가를 몇군데나 돌아다녀야하고 평일에도 결혼식을 찾아 다니며 토요일에는 고스톱을 하고 일요일에는 골프장 안내를 맡는다. 마당발이 되어야 한다. 마당발이 아니고서는 「실세」들에 눈에 띌 수도 없고 출세가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마당발 지향」의 폐해를 우리는 곳곳에서 본다. 일부 은행간부는 경영효율을 따질 시간과 자질을 갖지못한 탓으로 부실채권을 늘렸으며 어떤 간부들은 짧은 지식으로 전문적 대응책이 요구되는 사안을 다루려다 망신당했다. 각계에도 그런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다.
정권의 끝물에 TK본고장의 돈줄을 쥐고있는 금융인들의 노골적인 싸움은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다. 그런 갈등이 경제 각 분야에서 TK대 비TK간 인사내분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당국은 적절한 대책을 찾아야한다.
○관권인사 이젠 그만
은행인사의 경우 정부가 더 이상 간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단 1주의 주식도 갖고있지 않은 정부가 어째서 시중은행·지방은행 인사에 계속 간여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않겠다고 은행법까지 고치고서도 다시 「범법」하는 것은 여전히 인사의 꿀맛에 빠져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제 정부가 비TK인사들로부터 정치적 협박까지 받고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자업자득이요,업보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으나 변화는 수용되지 않고있다. 이러다가 우리들은 또 무슨 희극을 보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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