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 원로 최태섭 한국유리회장(일요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경분리 철저히 돼야죠”/국민당바람 재계 영향줘선 안돼/기업이윤 일부는 사회 환원해야
기업과 정부는 늘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때로는 정경유착으로 양쪽이 비판을 받았다. 현대그룹의 세를 얻은 국민당이 정치권에 바람을 일으키면서 기업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기업인들은 우리나라처럼 기업하기가 어려운 나라도 드물다고 말한다.
정치적 격변이 있을때마다 「반사회적 기업인」이 나타났으며 「부의 편재」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그들이 이뤄낸 일에 대해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이 투영되었다.
기업인은 어떻게 좌표를 잡아나가야 하는가,또 돈은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대한 재계의 도움말을 얻기위해 한국유리공업(주) 최태섭 명예회장(82)을 「일요 인터뷰」에 초대했다.
최회장은 57년 한국유리를 맡은 이래 유리 한 업종에 매달려 국내 유리산업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이병철·이정림 회장 타계이후 재계의 연장자로서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요즘은 종교단체,사회단체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여의도 한국유리 사옥에서 만난 최회장은 유난히 큰귀에 온화한 표정 그대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지만 산사에서 흔히 볼수있는 보살의 느낌을 주고있다.
­요즘은 기업보다 사회사업활동을 많이하고 계신데 주로 어떤 일에 간여하고 있습니까.
▲기독교총연합회의 각종 모임에 고문·이사·자문위원 등을 맡고있는데 요즘은 군복음화에 깊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사회단체 일로는 안중근기념사업회,고당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있고 최근에는 집사람이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정박아 학교인 우성원,한국구화학교 일에 애착을 갖고 열심히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이 최근 자서전에서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개인의 경우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의 10∼20%를 사회봉사에 써야한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노력했지요. 그러나 기업경영에서 채산을 맞춰 이익을 내야 사회봉사도 할수 있습니다. 기업인에게 있어서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익을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이것이 바로 기업인이 사회에 져야할 책임입니다.
­최회장께서는 그동안 능률협회등 경제단체뿐 아니라 경실련과 같은 재야단체에서도 상을 받았는데 이같이 상을 많이 받게된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내 생이 얼마남지 않았으니까 여생이나마 정신차려 잘 살라는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상을 받을 때마다 느낍니다만 앞으로 짧은 여생은 아름답게 또 열심히 살아갈 계획입니다.
­그동안 기업인들이 「돈 버는데만 급급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나 다 그렇듯이 돈을 버는데도 성실이 뒤따라야 합니다. 성실을 떠나 돈을 버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지요. 다행히 내 주위에 기업인으로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은 성실합니다. 그러나 간혹 좋지못한 한 두사람이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이로 인해 기업인 전체가 불명예를 함께 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6공들어 기업인과 기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각종 규제가 나오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간혹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돈버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할때가 있습니다. 물론 땅을 사두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돈을 버는 방법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건이라도 하나 만들어 팔아 이문을 남겨야 돈버는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 부동산투기로 인해 돈의 가치가 무시되고 이로 인해 과소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쉽게 번돈이라 쉽게 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투기억제등 6공이 추진하고 있는 일부정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전경련이 기업들이 공동으로 해야할 일,또는 국민들에게 알려야할 일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데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경련이 너무 대기업 위주로 운영되어 왔다는 여론에 따라 유창순 회장이 등장했습니다. 유회장은 이상적인 생각을 가진 분인데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인지 뜻대로 안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듯 합니다. 그러나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재계 원로들사이에는 혹시 유회장이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을까 오히려 걱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정주영씨의 국민당 출현이후 전경련의 입장은 어떻게 달라질 것으로 보십니까.
▲(대답이 곤란한듯 잠시 망설이다) 지금으로서 가장 우려되는 일은 국민당의 힘이 커짐으로써 현대그룹의 영향력이 커지고,이에 따라 현대와 중복되는 업종을 많이 하는 그룹일수록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정주영씨는 현대와 완전히 손을 끊겠다고 했지만 정과 경이 분리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믿기 힘든 일입니다. 더욱 어려운 일은 유창순씨가 아니라 어느 누구가 전경련 회장으로 앉아도 현재 재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추스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지금 재계에서는 이 문제의 거론을 꺼려하는 분위기이지요.
­기업과 정치,또는 정치자금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수 없는 문제인데 앞으로 어떤 문제가 예상됩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돈이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여서 재계에서 부담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당의 출현과 총선이후 달라진 재계 분위기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걱정거리입니다.
­재계원로로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하고싶은 얘기를 말씀해주시죠.
▲정치안정과 제조업 위주의 경제체질을 키워나갈수 있도록 정치인과 기업인이 힘을 합쳐야합니다. 정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가 위협받습니다. 또 정부는 경제지표만을 보고 현재의 경제상황을 너무 낙관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중국에 둘러싸여 고가품은 일본에,저가품은 중국에 국제시장뿐 아니라 내수시장까지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나가다간 언제 큰일날지 모릅니다. 현재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인식할줄 아는 정치인·기업인의 자세가 아쉽습니다.<한종범 경제부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