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논술의힘] '국가 체급' 다르면 경쟁의 룰도 달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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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협상 타결로 미국으로 수출되는 우리 자동차에 붙는 관세가 조기 철페돼 대미 수출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중앙포토]

한국의 초등학생 11명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축구 시합을 한다. 룰이 엄격하고 공정할 경우 승자는 누가 봐도 맨체스터다. 형식적으론 룰이 공정하지만 내용적으론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런 통찰력은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E 스티글리츠(1943~)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쓴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에 담겨 있다.

스티글리츠는 세계 무역이 좀 더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빈곤국에 엄격한 상품 분류나 검사 같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을 100% 준수하라는 요구는 무리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나라는 규정 준수 의무를 폭넓게 면제받아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무역이다.

선진국은 약자인 개발도상국들을 위해 양보와 협력을 해야 한다. 따라서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발도상국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무역 협상은 과거와 달리 '흥정'이라기보다 '기술'이다. 선진국에 비해 돈과 지식이 부족한 개도국은 애초부터 선진국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어렵다. 선진국은 협상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이 풍부하지만 개도국은 영어가 안 돼 의사소통마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선진국과 개도국은 이 밖에도 금융 위험 관리 능력 등 국가 간 조건에서도 차이가 난다. 위험 관리 기술이 있는 선진국은 유가 급등으로 인한 석유 파동이 일어나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개도국은 그 피해에 완전히 노출된다. 우리나라가 1970년대 석유 파동 때 경험한 사례처럼 말이다.

선진국은 게다가 입으로는 보조금을 없애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엄청난 보조금을 자국 농가에 지급하고 있다. 보조금을 받는 농가는 싼값에 농산물을 수출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못한 가난한 나라의 농산물 가격은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래서야 국제 무대에서 공정한 경쟁이 되겠는가.

스티글리츠는 선진국이 빈민국에 10원을 지원하면 자국 산업 보조금 등을 통해 30, 40원의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책의 골자는 '자유무역의 활성화'다. 다만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자유무역을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도국들의 처지와 형편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공정한 국제 무역 질서가 하루빨리 자리 잡혀야 한다.

스티글리츠는 공정 무역을 통해 세계 경제를 지금보다 더 활성화시키고, 거기서 생긴 이득을 세계 각국이 고루 누리자고 역설한다. 관세와 비관세 장벽, 기타 제도적인 장애 때문에 제대로 이동하지 못하는 무역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듦으로써 많게는 수천억 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해 인류 복지에 쓰자는 의미다.

송철복 (금융감독위원회 정책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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