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독 외무장관/겐셔외교 이상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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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74년 취임… 「부동의 인기 1위」 지켜/콜 총리와 함께 통독의 최대 일꾼
「할레출신의 메테르니히」. 지난 21일 65회 생일을 맞은 한스 디트리히 겐셔 독일 외무장관에게 야당인 사민당(SPD)의 오스카 라퐁텐 부총재가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새로 붙여준 이름이다.
지난 74년 독일 외무장관에 취임,현존하는 세계 최장수 외무장관인 겐셔장관의 65회 생일을 맞아 요즘 독일에선 「겐셔 현상」으로 불릴 정도로 겐셔 바람이 불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특집기사들을 연일 보도하고 있으며 각계 주요 인사 2천여명이 참석한 그의 생일파티에선 6백여명의 지지자가 서명한 초대형 생일축하카드가 전달되기도 했다.
「조화의 명수」 「슈퍼맨」 「타고난 외교가」 「살아 남는데 귀재」라는 칭찬이 있는 반면,다른 한편에선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겐셔 장관은 독일 정치인 가운데 부동의 인기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자민당(FDP)은 지지도 10%대의 만년 제3당이지만 겐셔 장관의 정치·외교적 기량은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1927년 구동독 할레시 근처 라이데부르크 출생인 겐셔 장관은 할레대와 라이프치히대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전후 동독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52년 서독으로 탈출,자민당에 가입했다.
69년 사민­자민연정의 브란트정권때 내무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그는 74년 슈미트정권때 외무장관이 됐다. 슈미트 정권이 점차 좌경화하던 82년 자민당은 연정을 탈피했다. 그후 자민당은 기민당(CDU)과 제휴,콜정권이 탄생했다.
겐셔는 그후 외무장관으로 계속 재임하면서 동서냉전과 독일통일,그리고 냉전체제 붕괴와 새로운 국제질서 창조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자 주역이 됐다.
겐셔 장관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참다운 개혁주의자임을 인정한 최초의 서방지도자였다.
이때문에 그는 미국은 물론 유럽의 많은 동맹국으로부터 불신을 받기도 했다. 이때 영·미 언론이 붙여진 「겐셔리즘」이란 말은 기회주의 또는 회색분자 등의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증명한다. 겐셔 장관의 외교적 수완이 유감없이 발휘된 무대는 바로 자신의 평생소원이었던 독일통일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콜총리가 저돌적으로 통일을 밀어붙였고,겐셔 장관은 외교적으로 미·영·프랑스·소련을 설득,「통일허가」를 받아냈다.
특히 독일통일에 가장 반대하던 마거릿 대처 전 영 총리의 방해공작을 보기좋게 따돌린 것은 겐셔 외교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겐셔 외교가 항상 성공만한 것은 아니다. 걸프전에서의 오판은 겐셔 외교의 최대의 실패작으로 꼽힌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던 그는 바그다드에 첫 폭격이 시작된후 1주일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겐셔 외교는 유럽통합주도,유고 두공화국 승인주도 등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고 이에 따른 미국과의 마찰은 그가 해결해야 할 새로운 현안이 되고 있다.
그가 앞으로 더 외무장관직을 유지해 고안드레이 그로미코 전 소련 외무장관의 28년 재임기록을 깰 수 있을지 또는 종종 그를 유혹하는 사민당과 다시 연정을 구성해 대망의 총리직에 오를 수 있을지 아니면 일반의 예상대로 대통령이 될지,앞으로 그의 거취가 이제 국민적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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