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곤소곤 연예가] 박경림과 야한 비디오 보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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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의 가장 흔한 거짓말. '언제 우리 밥 한번 먹어요'. 하루 세끼, 일년이면 천번도 넘게 밥을 먹건만 그 천번 안에 끼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다. 그럼에도 먼저 밥 먹자 졸라대던 스타가 있었으니 내겐 너무 네모난 그녀, 박경림.

딱 일년 전. 유학을 결심한 경림은 방송을 줄이고 본격적인 준비에 매달렸다. 기숙사.학교.서류.비행기표….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그래서 방송생활 7년 만에 처음으로 '여유'라는 것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어부지리로 그녀와 내가 함께 하는 시간도 많아졌는데…. 여자 둘이서 눈이 빨개지고 목이 쉬도록 밤새 수다떠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수다의 소재는 끊일 줄 몰랐고, 여고시절 수학여행처럼 지치지도 않았다. 그러기도 하루 이틀.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문화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비디오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보지 않는 영화를 고르기란 서로의 이상형 찾기보다 어려운 일. 이리저리 비디오 가이드를 뒤적거리던 중 생면부지의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페이지가 있었으니…. 바로 에로영화! 서로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는 우리는 곧바로 작품 선정에 들어갔다.

"이거 어때? 진짜 웃긴다. '야한시대' '여관괴담'도 있네?"

"언니, 제목이 웃긴다고 고르면 안된다고요. 나름대로 감독과 배우의 철학이 담긴 예술성을 생각하셔야죠."

예술이라…1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 우리는 전문가의 추천을 받기로 했다.

"경림아, 여기 언니 단골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전화해라."

"아니, 대한민국에 제 목소리 모르는 사람 있냐고요. 언니, 저 연예인이거든요?"

15분 후. 시행과 착오, 우여와 곡절 끝에 에로계의 심은하라는 모 여배우 작품의 비디오가 배달됐다. 우리는 숨죽이며 영화에 몰입했다. 그러나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 어디가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우의 연기, 스토리 전개, 그리고 카메라 워킹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 시작됐다. 그러고는 서로 다음 장면 예측과 영화 속 옥에 티를 찾는 데 혈안이 됐다. 경림이와 함께라면 에로영화도 두배로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리는 영화를 본 것인지, 수다를 떤 것인지 심오한 허기가 밀려왔다. 그러나 영화 속 배우들이 맛있게 먹던 삼겹살을 먹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각…. 경림이가 나름대로 몸매를 고려해 고른 야참 메뉴는 바로 멸치육수 푹 고아 말은 즉석 손칼국수였다. 그녀의 여고시절 출출한 위와 장을 아낌없이 채워줬다는 그곳은 연신내 역 부근 인심 좋은 모녀가 쉴새없이 국수를 말아주는 작은 포장마차였다. 볼에 닿는 영하의 차가운 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질 만큼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을 우리는 국물 한 방울까지 말끔히 비워냈다.

요즘처럼 알싸한 날씨. 내 기억의 온도계는 손난로처럼 뭉근한 온기의 매력 박경림과 추울수록 더 끌리는 입맛, 그 날의 손칼국수를 그립게 한다.

이현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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