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변화」를 바라고 있다/유승삼(유세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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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의 유세장마다에선 누구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청중과 만날 수 있다. 연단 앞쪽에 자리잡고 말끝마다 박수와 함성을 올리는 조직적인 청중과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서거나 앉아 덤덤한 표정으로 유세전을 지켜보는 분산된 독립적 청중이다.
청중의 이러한 나뉨은 우리의 정치현실을 잘 상징해주고 있다. 두무리의 청중사이에 자연스레 형성된 빈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현실정치,기성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허무일 것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동원된 청중과 함께할 마음도 나지 않고 그렇다고 유세를 그냥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착잡한 심정들이 그사이 공간들을 떠돌고 있다.
○두가지 부류의 청중
캐들어가면 동원된 사람들의 심정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민자당 후보의 운동을 위해 나선 한 여성에게 말을 건네본다.
­민자당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지역구를 위해 일할 사람을 뽑아야지요. 인물이 제일 낫잖아요.』
이번엔 민주당 후보측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민주당이 지지할만 합니까.
『그래도 민자당 보다야 낫지요.』
무의식중에 내뱉은 「그래도」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 멀찌감치에서 지켜보고 서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본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들어보고 해야지요.』
­선택기준은 인물입니까,정당입니까.
『능력을 봐야지요. 다른건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닙니까.』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유세장에서 만나본 사람들의 주된 선택기준은 「인물」이고 아직 그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어도 서울등 수도권에 관한한 선거결과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고 결국은 투표함을 열어 보아야 판가름이 날 것 같다. 교과서는 민주정치가 정당중심의 정치여야 하고 인물중심의 선택은 현실을 고착시키며 정치난맥상을 가중시킨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의 정치현실은 유권자들을 어쩔 수 없이 인물중심의 선택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대로 지방 선거가 대체로 우리 정치의 오늘을 대변해왔다면,대도시의 선거결과는 내일을 반영해왔다 할 수 있다. 특히 서울이 그랬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닌듯한 변화의 조짐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선택의 기준은 「인물」
첫째의 조짐은 새로운 정치,새로운 인물에 대한 목마름에서 오는 것이다. 여당의 거물과 맞선 한 젊디 젊은 야당 후보자가 5공 청문회에서 5공을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추궁한 것이 누구였더냐고 반문하면서 청문회 스타였던 젊은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열거해 나가자 멀찍이 섰던 장년층과 노년층으로부터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몇몇 지역에서 국민당 후보가 의외로 강세를 보이는 것이 정주영씨나 현대나 돈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달라졌으면」 「새로워졌으면」하는 유권자의 밑바닥 심정이 가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변화조짐에 비할 수는 없지만 또하나의 미래완료형 조짐은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민중당등 몇몇 진보진영 인사들이 언젠가는 투표를 통해서도 제도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희망대로 의회진출이 가능할지는 두고볼 일이나 개인에 따라선 적어도 거부반응을 씻어내는데는 성공하고 있었다.
『인물은 똑똑하고 괜찮은데 정당이 좀…』 『진보정당도 필요는 한데 한 두석 얻어보았자…』 『다음 선거에는 꽤 괜찮겠는걸』 이것이 흔히 들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밖의 다른 조짐은 정치권이 총선 뒤에는 새롭게 개편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민자당은 여권을,민주당은 야권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정당투표제가 부분적으로라도 도입됐더라면 아마도 그 결과는 이번 선거결과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유권자의 동향은 선거제도의 대대적인 개혁도 요구하고 있다.
서울이 전체 유권자의 25%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국회의원은 14%밖에 내지 못하는 현행 제도의 한가지 모순만 보더라도 제도개혁의 요구는 필연적이다.
○선거제도 개혁 절실
어쨌든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갈등인 세대갈등,지역갈등,개혁과 보수의 갈등중 그 어느 것도 해소할 길을 마련해 주지 못한채 그저 인물 중심으로만 치닫고 있는 이번 선거는 갈피를 못잡고 당황하고 있는 민자·민주 양 거대정당들에 못지않게 유권자들에게도 곤혹스러움을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꼭 드는 후보자가 없더라도 차선을 택해 투표에는 나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말로서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차선의 선택이 누구에게나 쉬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땅한 선택이 없는 상황에서의 바람직한 차선의 선택이란 확고한 시국관과 냉철한 현실감각이 요구되는 고도의 지적 작업이다.
그러나 역시 모든 것은 투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변화를 위한 당장의 현실적 대안은 투표밖에는 없다. 정치를 외면하고 싶을수록,정치인에게 신물이 나면 날수록 오히려 더 투표에 나서야 한다.
유세장을 가장 많이 외면하고 있는 젊은이를 향해 한 유세장의 플래카드는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젊은이의 한 표가 민주국회를 만듭니다.』
한마리의 제비가 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봄을 예고하고 준비하게 할 수는 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위한 참여의 의지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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