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14. 주한 미8군 판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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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2년 말께였다. 주한 미8군 계약처 소속의 한 미군 하사관이 강원도 횡성에 있는 파스퇴르유업 공장을 찾아왔다.

"한국 유가공회사인 S우유.M유업.H유업.D우유가 미군에 우유를 납품하려고 하니 자격심사를 해달라는 유가공협회의 공문을 받았습니다. 그 공문을 결재 받는 과정에서 한 장성이 '내가 집에서 파스퇴르우유를 먹고 있는데 아주 좋다. 파스퇴르우유도 자격심사에 참가할 뜻이 있는지 물어보라'는 명령을 받고 이렇게 왔습니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식품을 미8군에 납품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주한미군은 신선도가 중요한 채소조차 우리나라에서 구입하지 않고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오거나 아예 미국 본토에서 가져다 먹었다. 인분을 비료로 쓰는 우리나라 농업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우리나라의 유명 유가공 업체들이 도전장을 던졌다. 이들은 "우리 우유를 심사해 보고 합격할 경우 납품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연명으로 미8군에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문을 받은 미8군 계약처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한 장성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가 집에서 마시고 있는 한국 우유의 품질이 미국 본토에서 마시던 프레시우유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데 그 회사는 왜 빠졌느냐며 자격심사 참가 의사를 확인해 보고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었다.

나는 물론 동의했다.

"그 장성에게 기회를 줘 감사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반드시 자격을 획득할 것이라고도 전해 주시고요."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유업도 미8군에서 실시하는 자격심사 대상 업체에 포함됐다.

1차 심사가 시작됐다.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미8군 계약처.주한미군 106부대(위생검사부) 관계자는 물론 미국 본토에서 온 우유 전문가, 미군 의무감실 직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심사가 진행됐다. 1차 심사 결과가 너무 뜻밖이었다. 파스퇴르유업만 1차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2차 심사는 그야말로 현미경으로 먼지를 들여다 보듯 치밀하게 실시됐다. 심사 기간이 2년을 넘었다. 자기 나라의 군인이 먹는 음식을 철저하게 심사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 존경심이 우러나올 정도였다. 마침내 파스퇴르우유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본토의 육군 의무감실이 "주한 미8군의 심사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프레시우유를 제대로 만드는 회사가 한국에 있다는 것도 못 믿겠는데 더욱이 덴마크.호주 등의 전례에 비춰볼 때 2년여 만에 심사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자세였다.

미국 본토 의무감실의 특명을 받은 우유 검사관들이 우리나라로 파견돼 새로운 검사를 실시했다.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한 적이 없는 특수 기계와 방법까지 동원해 1년 동안 검사했다. 마침내 검사관들은 "정말 훌륭한 우유다. 아무런 조작이 없었다. 합격을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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