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2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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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경이 된 엄마를 보고 있노라니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다. 나는 엄마 옆에 어떤 남자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혼자서 춤을 추며 사는 것이 어울리는 여자 같았다. 글쎄, 엄마의 말대로 세 번의 이혼 이후 "엄마는 결혼과 이혼했으며 세상이 자신에게 강요했던 모든 거짓 잣대와 이혼했다" 고 말했기 때문이었을까? 한번은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언제나 그렇듯 내 방에 들어오더니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위녕, 모르는 사람들이 나보고, 결혼은 하셨어요? 자꾸 묻는다. 네 생각엔 왜 그러는 거 같니? 혹시 엄마가… 너무 젊어 보이는 건…."

엄마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내 눈초리를 느꼈는지, "그건 아니고…. 그렇지, 당연히 아니고… 그런데 왜 그럴까?" 하고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엄마는 내가 "엄마는 젊어 처녀 같아"이런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언젠가는 외국에 다녀오더니, 나를 붙들고 말했다.

"오늘 말이야 비행기에서 내려서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아가씨 여권 떨어졌어요' 이러는 거야. 엄마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그대로 여권을 집어서 막 뛰어 왔어…. 될 수 있는 대로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이야. 뒤돌아서서 고맙습니다 하면, 얼굴 보고 에이, 아가씨 아니네 할까봐."

이쯤 되면 누구 말대로 공주병 말기를 지나 '공주 암'에 이르른 것 같기는 하다. 물론 가끔 내가 "엄마는 나이보다 정말 젊어 보여" 이런 말을 해 줄 때도 있는데, 그건 내가 용돈이 필요하거나 친구랑 놀러나갔다가 아무래도 많이 늦을 것 같을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뿐 아니라, 유효기간이 지난 것도 모르고 영영 그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설마 믿지는 않아도, 혼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아아, 내가 믿기 싫어도 그건 틀림없는 사실인가봐, 저 똑똑한 우리 딸이 그러잖아" 할지도 모른다.

나는 풀던 수학문제를 덮어놓고 엄마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그건 왜냐면… 결혼한 여자의 얼굴에는 빛이 없거든."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어떤 충격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친구들의 엄마를 보면서 느낀 거였는데, 안정감이라든가, 노련함이라든가, 하는 표정은 있었지만 뭐랄까, 반짝반짝이는 빛 같은 것은 본적이 없었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게 좀 안되긴 했지만 내 친구 엄마들의 얼굴에는 늘 "세상에 새로운 게 뭐가 있겠어. 나쁜 일이나 없으면 됐지" 하는 어떤 체념 같은 것이 딱딱하게 어려 있었다. 엄마는 내 말에 잠깐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엄마, 나 만나러 뉴질랜드 왔을 때, 그때 엄마는 지금보다 솔직히 더 날씬하고 예뻤는데,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어…. 그런데 지금 엄마는 살도 좀 더 찌고 나이도 좀 들었는데-미안, 3년 전 일이니 양해하시길-훨씬 더… 뭐랄까, 빛나 보여." … "그거는… 그거는 위녕, 결혼을 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자신으로 살아가는가의 문제야.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얼마나 지키고 사랑하고 존중하는가의 문제라니까…."

"알아. 그런데 그게 없더라니까, 거의 본 적이 없어. 그럴 때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저 여자는 아줌마구나."

엄마는 내 말을 곰곰 생각하다가 두 팔로 제 어깨를 감싸 안더니 말했다.

"… 위녕, 난 가끔 네가 무서워."

아무튼 그 여름이 다 가도록 아무 일도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는 전화를 기다리는 일에도 지쳤는지 곧 휴대폰을 아무데나 팽개치고 다녔다. 가끔 식탁 위나 화장실, 혹은 소파 쿠션 밑에서 엄마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어대서 참다못한 내가 "엄마 전화 왔어!" 하고 말하면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나 말하곤 했다.

"그거 내가 건 거야. 휴우 겨우 찾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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