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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여선생' 환상을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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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지방 상고를 졸업해 그 흔한 대학 졸업장 하나 없이 사법시험에 합격, 인권 변호사.청문회 스타 의원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전임 대통령도 상고를 나왔다. 상고 출신 대통령이 두 분이나 잇따라 나왔는데 어째서 우리의 실업교육은 뒷걸음만 쳐 온 것인가. 또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는 엄연한 현실을 보면서 왜 대학입시 광풍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가. 이 두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교육현실을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교육 3불정책을 둘러싸고 대통령.정부와 대학총장들이 맞서고 있다. 마치 3불정책만 없애면 우리 대학이 세계 초강국 수준에 오를 것 같이 큰소리 내고 있고, 또 3불정책을 허물면 우리 교육이 왕창 무너질 듯 감싸고 있으니 이런 난센스 게임이 있을 수 없다. 평준화 정책 실시 이전엔 대학별 고사에 현금 기여 청강생까지 성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학 강의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시골 아버지들이 소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원성의 현장이기도 했다. 대학 수준이 전과 달리 향상됐고 서울대가 본고사든 고교등급제로든 우수 인재를 뽑는다고 하자. 학생들의 절반의 절반가량이 전공은 팽개치고 각종 고시 공부에 파묻혀 지내는 게 현실이다. 여기에 의과대학원 응시까지 몰려갈 때 국가의 고른 인재 양성에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 3불정책 폐지는 선발권의 자율화지 대학 수준 향상의 담보물은 아니다.

"경쟁환경에서 더 유리한 사람들은 계속해 본고사를 내놓으라며 맘껏 경쟁시키자고 하는데 거기에 치여 무너지는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겠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항구적으로 가난을 대물림할 뿐이다." 노 대통령이 3불정책을 고수하겠다며 한 발언이다. 발언 저변엔 대학 곧 가난 극복이 전제돼 있다.

1948년에 제작된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무성영화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가난하면서도 똑똑했던 제자를 여교사는 사랑으로 감싼다. 제자는 열심히 공부해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돼 살인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선 여선생을 석방시킨다. 광복 이후 기존 가치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공부-고시 합격-출세라는 성공 등식을 이 영화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학습시킨 셈이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바로 이 환상 때문에 풀리지 않는다. 명문대 졸업에 사시 합격을 해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다. 대졸 백수들이 거리에 넘쳐나는데도 전 국민이 대학입시에 매달리기 때문에 어떤 제도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5%로 단연 앞선다. 프랑스 56%, 일본 51%, 영국 64% 수준이다. (유네스코 2003년 자료)

실업고를 나온 임채식씨는 최근 세계 최대 열연공장의 책임자가 됐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곡성 실업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해 30년간 쇳물과 불꽃 속에서 살았다. 압연 명장(名匠)으로 광양 제철소 1열연공장 공장장이 된 것이다. 내 친구 중엔 이런 인물도 있다. 그는 지방 상고를 마치고 상경해 주경야독으로 대학 야간부를 마쳤다. 공군에 입대해 비행기 정비병 근무, 제대 후 대한항공 정비사로 입사해 지금은 국제화 시대 첨병인 대한항공 CEO가 됐다. 물론 이들은 계속교육과 치열한 자기 연마를 통해 오늘의 성취를 이뤘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 승리다. 국가가, 사회가 이들을 존경하고 이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일생일업으로 만족하며 계속교육.평생교육을 통해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는 사회 교육체계를 갖춰야 한다.

평준화 교육에 정부가 목을 매달 일이 아니다. 차별화 교육을 해야 한다. 디자인.자동차.애니메이션.영화 등 이미 다양해진 직군에 맞춘 실업.정보.산업학교와 직업 전문대 강화에 주력하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 정부가 모든 교육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위로는 상위 5% 이내 인재를 국제경쟁력을 갖춘 인력으로 키우기 위해 5개 이상의 초일류 지역별 국립대학을 적극 육성하고 아래로는 20~30% 정도의 학생을 정보.산업화 시대의 현장 역군으로 배출하는 데 전념하라. 나머지 교육은 대학 자율에 맡기면 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권영빈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