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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허브국가'로 다시 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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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 한반도 상황은 110년 전 대한제국 처지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명성왕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다 시해당했다. 신변 위기를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가 1년 만에 돌아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역설적이게도 해양과 대륙 세력이 맞닥뜨리는 샌드위치 상황에서 조선은 대한제국이 될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취임사에서 한국이 동북아시대 중심국가로 비약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탈냉전 시대에 한반도가 해양과 대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4년이 흐른 지금 '중심국가' 대신 '샌드위치 코리아'라는 위기 담론이 유행한다. 노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란 고종의 '대한제국'처럼 장밋빛 꿈에 불과했다. 북한 핵실험 이후 전개된 상황은 한반도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해양세력인 미국과 대륙세력인 중국임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책은 없는가. 우리가 독자생존의 길을 추구할 수 있는 묘책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120년 전 유길준이 제안한 한반도 '중립화'다. 유학을 통해 미국의 실체를 꿰뚫어 봤던 유길준은 미국은 통상 상대로서만 친할 뿐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대신 그는 중국에 기대 중립화의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중국이 6자회담 의장국이 돼 중재에 나선 것처럼, 그는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 아시아 지역과 이해관계를 가진 강대국들을 설득해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드는 역할을 중국에 기대했다. 오늘날 북한이 중국을 후견인으로 하여 외교를 펼치는 것을 보면, 역사의 반복은 계속된다. 하지만 2.13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는 점은 한반도 정세의 구조적 변동을 예고한다. 대륙과 해양 세력으로 양분된 한반도에서 마침내 긴장을 해소하는 교차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21세기에 한반도 '중립화' 프로젝트는 '샌드위치 코리아'가 아니라 '동북아 허브국가'가 됨으로써 실현 가능할 수 있다. 마침내 우리는 미국과 FTA를 체결해 그 첫발을 내디뎠다. 다음 협상 상대는 중국과 일본이다. 이런 식으로 FTA 체결을 확대해 가는 가운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양 및 대륙 세력의 물류를 집결하는 허브가 될 수 있다. 근대에서 인간은 자비심에 호소하지 말고 이기심에 의거해 타자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국가들 간에도 공동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토대로 할 때 가장 강력한 안보동맹이 맺어질 수 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 말대로 자유로운 상태가 아닌 주어진 조건 속에서만 인간은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나오고 피겨와 수영에서도 세계 정상으로 도약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샌드위치가 아닌 '동북아 허브국가'로 도약하는 발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정치 지도자를 2007년 대선에서 뽑아야 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