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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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이 그의 어떤 상처를 건드렸구나 싶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지금은 딴 나라에 있어." 나는 그 후로는 그에 대해 가족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우리 집 이야기를 했다.

"가끔은 동생들이 결혼하는 장면을 생각해요. 그러면 질투로 온몸이 부르르 떨려와요. 그것들이 나보다 다른 여자를 더 사랑하는 것을 생각만 해도 화가 나서요. 엄마는 이런 소릴 하면 '엄마도 안 그러는데 네가 왜 그러니?'하고 말해요. 그러고는 '난 내가 늙어도 좋으니까 너희들이 빨리 컸으면 좋겠어'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가끔 동생들이 내게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시킬 때면 묻곤 하죠. '니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하구요. 처음에는 요것들이 눈치도 없이 '김태희''송혜교' 이런 대답을 하더니, 요즘에는 알아서 '그야 누나지'하고 대답해요. 안 그러면 절대로 과자나 아이스크림 안 사다 주거든요."

그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표정으로 보아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친구랑 만나 노느라고 하루 종일 서점에 들르지 않으면, 지나치듯이 묻곤 했던 것이다.

"어제는 바빴나보구나."

나는 그와 만나면서 그가 엄마의 친구가 되면 좋겠다,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비슷한 연배이고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둘 다 혼자이니까 말이다. 그는 서점을 열기까지는 한 일간지의 기자 생활을 했다고 했다. 먼 나라에 특파원으로 파견된 일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좋아한다는 남자의 목록과 그를 비교해보곤 했다. 비록 그가 머리도 약간 벗어질 기미가 보이고 배도 좀-아니 많이-나오고 돈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좋아했다. 그에게는 엄마에게 늘 느껴지는 그 수선스러움과 쫓기는 듯한 기색이 없었다. 성실해 보였고 침착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게 아빠를 연상시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빠에게는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가끔 나로 하여금 배를 잡고 웃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기자 생활을 하는데, 그때가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였어. 아마 87년 무렵이었을 거니까 위녕 너는 엄마 뱃속에 막 생겨나 있을 때였겠구나. 그때 우리 회사에서는 마침 금연 캠페인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장이 나를 부르더니 88올림픽과 금연 캠페인을 어우러지게 해서 표어를 하나 지어 오라는 거야. 내가, 아니 88올림픽하고 금연하고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하니까 부장이 피라미인 내게 '인마,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아? 둘 다 좋은 거잖아?'하는 거야. 에이, 그래서 끊으려고 생각했던 담배를 다시 사다가 한 갑이나 피워대면서 겨우 지어다 줬지."

"뭐라고 지으셨는데요?"

내가 물었다.

"담배 끊고 오래 살아 88 오륜 보고 죽자."

그럴 때 그의 얼굴은 이상한 자만심으로 빛났다. 내가 그가 하는 말에 허리를 못 펴고 웃으면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회사 입사 시험 문제를 내라는 거야. 상식 분야. 그래서 내가 문제를 냈지. 다음 중에서 올림픽 마라톤의 금메달 주자는? 일 전두환 이 노태우 삼 황영조 사 이상구. 그랬더니 부장이 막 화를 내는 거야."

"왜요?"

"이상구를 썼다고 말이야. 이상구는 우리 회사 오너였거든….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바꿔버렸어, 사 정준형이라고."

"정준형이 누군데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그건 바로 나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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